[집중해부-박근혜] "박정희 후광…소신과 원칙의 여성정치인"
[집중해부-박근혜] "박정희 후광…소신과 원칙의 여성정치인"
  • 소정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12.10.0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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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박근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는 누구인가

모친서거 퍼스드 레이디역 '정치적자산' ...부친흉탄 절명이후 18년 칩거 암중모색

제15대 국회 보궐선거 당선 화려한재기...선거 위기시마다 '구원투수' 승리이끌어

'원칙과 소신' 지도자 이미지 지지 동력...과거사문제 전향적자세 부재 여론 싸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Newsis

■ 한국 최초의 첫 여성 대선후보

“박근혜 후보가 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음을 선포합니다.”

지난 8월 20일 새누리당은 일산 킨텍스에서 18대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선거인단 투표와 여론조사를 합산한 결과 8만6,589표를 기록한 박근혜 후보가 역대 최고의 득표율인 84%를 기록하면서 다른 후보들을 압도적 차이로 제치고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우리나라 집권 여당 사상 첫 여성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수락연설에서 "국민 대통합과 정치 개혁을 통해 반드시 정권 재창출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7월 10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 대권 도전에 나섰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 속에 정치를 시작했다는 평가 못지않게 5선 국회의원을 거치며 '원칙과 신뢰'를 최대의 정치 자산으로 삼아 제18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새누리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박근혜 후보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정치인’이다.


■ 장녀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정치감각

누구보다 정치와 권력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꿰고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 받는 박근혜 후보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고(故) 육영수 여사의 장녀로 1952년 2월 2일 대구에서 당시 육군 정보학교장이던 박정희 대령과 어머니 육영수 사이의 2녀1남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 육군 소장인 부친은 5ㆍ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1961년부터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가 9살 때였으며, 박정희는 1963년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박 후보는 1979년까지 청와대에서 10대와 20대의 젊은 시절을 보낸다.

박근혜는 장충초등학교와 서울 성심여고를 거쳐 이공계인 서강대 전자공학과(70학번)를 선택한 명분에는 수출을 늘리려면 전자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데에서 자대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박근혜는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만 빼놓고는 평범했다. 서강대 전자공학과 재학 당시에는 늦은 밤까지 공부에 매달리느라 미팅 한 번 못해봤다. 서강대 이공학부 수석 졸업 후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첫 시련은 22세인 1974년도이다. 프랑스 유학 첫해인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모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절명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이때부터 5년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며 국정운영의 일익을 담당했다.

박근혜 후보는 선친 곁에서 국정 운영을 배웠으며 청와대 직원들의 보고를 메모하는 습관은 '수첩공주'라는 별명을 얻는 단초이다.

이후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박 전 대통령의 서거 후에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오명에 묻혀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신당동 옛집으로 귀환한 박근혜는 무려 18년간이나 칩거했다. 이 기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거나 서적을 탐독하며 '훗날'을 기약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기간 동안 박근혜 후보는 걸스카우트 명예총재와 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학교 이사장,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을 맡으며 부모의 유지 계승에 전념했다.

■ 이회창 대선후보 도우며 정계복귀

박근혜 후보가 정계를 노크한 것은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도우면서 부터다. 1998년 46세의 나이가 된 박근혜는 4월 2일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달성에서 당선되면서 정치활동을 본격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지역구인 대구 달성에서 내리 4선을 했다.

박근혜는 정계에 입문한 지 2년 후인 2000년에는 당시 이회창 총재에 이어 2위로 부총재로 당선됐다. 중앙 정치에서 활동의 보폭을 넓히기 시작하면서 개인적 정치력의 비약을 이룬 것이다.

2001년에는 상향식 공천, 당권·대권 분리 등을 골자로 한 '7대 당 개혁안'이 수용되지 않자 2002년 3월 한나라당 탈당이라는 초강수를 둔다. 탈당에 이어 박근혜는 '한국미래연합'이란 이름으로 신당을 창당해 정치적 입지를 탄탄하게 굳힌다. 우여곡절 끝에 박근혜는 그 해 10월 한나라당으로 전격 복당한다.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로만 인각되었던 박근혜가 잠재적 국가 지도자 대열에 오른 건 17대 총선 때다. 불법대선자금 수수와 노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침몰 직전이던 2004년 3월 당대표를 맡아 '구원투수’로 전격 등장한다.

박근혜는 국민 앞에 과거를 통렬히 반성하고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비장한 각오에서 ‘천막당사'를 감행하며 강력한 ’쇄신‘의지를 피력해 국민들로부터 관심을 다시 돌려놓았다.

한 달 후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국회의원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완승을 이끌었다.

박근혜는 5년 뒤인 2007년 17대 대선 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서울시장 출신의 이명박 후보와 치열한 대권 레이스를 벌였다. 애석히도 8월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 첫 시도한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 세종시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으로

2008년 이명박 정권 출범 후 박근혜는 다시 정치적 시련기를 겪는다. 당권을 장악한 친이(친이명박)계에 의한 18대 총선 공천 '친박(친박근혜)계 학살' 논란이 불거지며 당내 '비주류'로 전락했다.

정치적 혹한기를 맞은 박근혜는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협조에 무척 소극적이었던 만큼, 정치적 '칩거'에 함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박근혜는 2009년 미디어법 입법에 반대하며 여권 주류와 대충돌한다. 특히 박근혜 후보를 ‘여당 내의 야당’으로 각인시킨 계기는 세종시 문제다. 2010년 정부의 세종시 수정 추진ㅂ법안에 급제동을 걸면서 이 대통령과 정면충돌하는 위기를 감수했다.

2004년 신행정수도특별법의 위헌판결 이후 한나라당이 공당으로서 확약했던 정부기관 이전 특별 법안을 사수해야 한다는 것이 박근혜의 지론이었다. 세종시 원안 고수는 그녀를 국민과의 약속은 필히 지키겠다는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으로 생생하게 각인시켰다.

박근혜 후보가 재차 여권의 주류로 급부상한 것은 지난해인 2011년 10·26 서울시장 재·보선 패배 후 한나라당 지도부가 사퇴하자 당 안팎의 여론에 따라 사실상 비대위원장으로 추대 되면서부터이다.

박근혜는 외부 인사를 대거 영입하여 비대위를 꾸리고 고강도 쇄신작업에 나선다. 당명은 새누리당으로, 당의 색은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유턴하였으며, 정강 정책에는 야당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던 ‘경제민주화’ 라는 파격적 조항을 삽입하는 등 극약 처방을 이끌었다.

박근혜 후보는 2012년 4·11 총선을 진두지휘하며 선관위 디도스 공격,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등 치명적 악재로 깊은 수렁의 늪에 빠진 새누리당 위상과 이미지를 부활시키는데 혁혁한 수훈감이 되었다. 예상을 뒤엎고 과반을 획득하여 뚝심 정치인의 저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것이다.


■ '과거사, 소통' 딜레마 '대선 최대 난관'

박근혜 후보는 올해 만 60세이다. 그녀가 이번 도전에 성공할 경우 건국 이후 첫 여성 대통으로 등극할 뿐만 아니라 부친과 함께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는 진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렇다면 박근혜의 차별적 장점과 치명적 약점은 진정 무엇일까?

박 후보의 장점으로는 국민에게 한 약속은 지킨다는 ‘원칙과 신뢰’가 손꼽힌다. 바로 이것이 '대세론'이 흔들리지 않는데 결정적 자산으로 작용하고 있다.
부정부패와 불법에 단호하고, 한번 옳다고 결단한 것을 번복하지 않은 결연함도 그의 장점들로 언급된다.

그러나 그녀 앞에 놓인 장애물 역시 만만치 않다. 박근혜 후보가 독재와 인권탄압, 비민주화 등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이면과 부정적 측면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돌파할 것인지가 향후 대선가도의 관전 포인트다.

'유신의 딸'이라는 오명, 5·16이나 인혁당 사건 등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전향적이지 않다는 비판에서 긴장할 일이다. 장준하 의문사 사건이나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서도 '박정희의 딸'이 아닌 '대권주자 박근혜' 입장에서 객관적 심층적 접근이 요망된다는 것이 대세 여론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여론의 등에 떠밀린 듯 9월 24일 박근혜 후보는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과 관련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음은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민주주의 가치라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5·16, 유신, 인혁당 사건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한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참회의 손길을 내밀었다.

또한 '불통(不通)'의 이미지는 박근혜의 아킬레스건이다.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측근들이 하나둘 그의 곁을 떠나면서 '불통의 정치인'이라는 맹공격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도권과 중도층, 20~40대 젊은 층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도 박 후보에게는 두통거리이다. 고정적 지지층이 견고하나 지지율이 정체돼 있고, 지지층의 외연확대가 지난하다는 것이 단점 중의 단점이다.

박근혜는 대선 슬로건을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로 정했다. 선거 전문가들은 대선 필승 전략으로 '박정희 시대의 보완'을 중점 거론한다. 선친이 이룬 공(功)은 계승하되, 과(過)는 보완해야 집권의 문을 노크할 수 있다는 지극히 원론적이고 통념적 해답을 내놓았다. 말처럼 쉽지 않으며, 박근혜가 처한 정치적 지지자산과 환경에서 결코 헤쳐 나오기 어려운 딜레마일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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