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열전2> 제4대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열전2> 제4대 대통령 윤보선
  • 소정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12.10.1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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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단명…과도기 문민정부”

상하이 독립운동 대한임시의정원 의원 활약
제2대 서울시장 역임 상공부장관 중책 맡아

1960년 4·19혁명 제2공화국 대통령 수반에
박정희쿠테타 1962년 3월 23일 대통령사임

1963년 제5대, 1967년 6대 대선 '연패 아픔'
1970년대 유신정국 민주화 주도, 94세 영면

▲ 제2공화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 부부(왼쪽)

● 상하이서 독립운동, 영국에서 수학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이후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제2공화국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본관이 해평(海平) 윤씨인 윤보선은 1897년 8월 26일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새말에서 아버지 윤치소씨와 어머니 이범숙씨 사이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보선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화려한 명망가 출신이다. 윤보선의 가계 중 무려 50여 명이 한국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둘째딸은 독립운동가 신규식의 장남과 결혼하여 신규식과는 사돈 간이 된다.

유족한 환경에서 성장한 윤보선 대통령은 10세 때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부친 윤치소는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에 감명 받아 윤보선이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자 다시 일본인들이 다니는 일출(日出) 소학교 5학년에 1910년 편입학을 하게 한 후 1912년 졸업했다.

졸업 후 도쿄로 건너가 1913년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 입학해 두 학기를 다니다가 다시 세이소쿠가쿠엔고등학교(正則學園高等學校)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마치지 않고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 여운형(呂運亨)과 조우를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대한임시의정원(大韓臨時議政院)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윤보선은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아버지의 권유로 1921년 6월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글라스고의 스캘리시라는 학교와 우드부르크 대학,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1930년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고 1932년 귀국할 때까지 10여년을 해외에 머물렀다. 윤보선은 귀국 후 1945년 해방 때까지 13년간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서울 안국동 자택에서 칩거 생활을 했다.

▲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은 1960년 8월 13일 태평로에 있던 당시 국회의사당,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취임식이 거행됐다.

● 이승만정권 실각, 제4대 대통령에 선출
윤보선은 해방과 더불어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본격 시작했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미군이 진주하게 되자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창당에 깊숙이 관여한다.

이어 미군정청(美軍政廳)이 영어를 능통한 인사들을 행정 요직에 등용하자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어 미군정청 경기도지사 고문직을 마친 후 1948년 5·10총선 때 고향인 아산에서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는데, 한영협회 회장과 민중일보사 사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어 운보선은 정부수립 후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제2대 서울시장을 역임한다. 윤보선은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운동 전개, 식량 배급 행정을 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유령 인구와 매점매석 단속 등의 시책을 벌였다. 1949년에는 상공부장관의 중책을 맡았다.

6·25 동란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 역을 맡았으며, 상이군인신생회 회장의 일에 헌신하면서 전재아동(戰災兒童)과 상이군인들을 위한 원호활동에 노력하였다.

윤보선은 1954년에 제3대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제4대, 제5대, 제6대 국회에 진출하면서 야당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1952년 폭거적 방식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하는 ‘발췌 개헌’을 통과시키자 윤보선은 이승만 대통령 정권과 결별, 야당으로 노선을 바꿨다. 윤보선은 1954년에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7년 당시 이승만 독재에서 야당의 중심에 섰던 민주당의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윤보선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59년 민주당 최고의원에 선출되었다. 당시 민주당은 신익희(申翼熙)·조병옥(趙炳玉) 등 구파의 핵심인사들이 죽고 난 뒤였기 때문에 김도연(金度演)과 함께 사실상 구파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한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민주당후보로 그해 8월 12일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민주당의 신·구파 사이에는 정권 창출의 갈등이 심하게 표출되었는데, 이 때 구파의 구심점에 포진하여 있었기에 신·구파의 협상에 의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또한 자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선임하였으나 국회인준 획득에 실패하자 신파(新派)의 장면(張勉)을 국무총리로 지명한다. 이러한 연유로신·구파는 사실상 분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윤보선은 1960년 4·19 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국이 요동치고 있을 때 헌법에서 내각책임제를 선택하고 있었기에 단지 의전과 명목상의 국가의 원수에 불과하였다.

▲ 윤보선은 1967년 두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으나 박정희 후보에 또다시 패배했다.

● 민정 이양후, 박정희 후보와 맞대결 석패
정치 사회적 불안정과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잇던 당시 내각제의 수반이던 장면정부는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쿠테타가 일어나면서 9개월 만에 붕괴했다. 박정희가 총리 권한을 실질 행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윤보선은 자신의 비서를 1군 사령관에게 보내 쿠데타 진압을 포기하도록 하였고 미군의 진압군 동원을 거절하였다.

이어 박정희의 군정 하에 윤보선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더욱 미미해졌다. 군사정변 이후 한때 국가의 정통성 계승과 외교관례를 고려하여 대통령직을 가까스로 수행하였지만 5.16군사혁명 발발 이후 10개월 즈음하여 윤보선은 사퇴를 확정한다.

군정당국은 소위 "정치활동 정화법"을 제정해 5.16 이전에 활동했던 지명도 있는 대부분의 민간인 정치지도자들의 정치활동을 상당기간 중지시키는 입법을 추진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대통령의 추인을 필요로 했다.

윤보선은 1962년 3월 23일 소위 ‘政淨法’(정정법) 효력의 발생에 필요한 서명을 했으나 그 입법취지에 반대한다는 의사표시 및 국가재건노력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당일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그 때부터 윤보선은 군사정변을 일으킨 세력에 맞서 민정회복을 주장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962년 12월 17일 대통령 중심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 개정안 통과에 따라 내각책임제가 대통령중심제로 변경되고, 대통령선거는 국민의 직접선거를 도입하되, 대통령의 잔임 기간이 2년 미만인 때에는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하도록 하였다. 1963년 1월 1일 정당 활동이 다시 허용되면서 새로운 정당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한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도 대한민국 국군을 예편하면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윤보선은 5.16 군사정변 후 1963년 민주당 구파 세력을 규합하여 5·16 군사정변 세력이 참여한 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드디어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후보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 민정당의 윤보선(尹潽善), 신흥당의 장이석(張履奭), 추풍회의 오재영(吳在泳), 정민회의 변영태(卞榮泰), 국민의당의 허정(許政), 자유민주당의 송요찬(宋堯讚) 등 7명이 등록하였다. 선거 막바지에 이르러서 야권 주요 후보였던 허정, 송요찬이 윤보선을 지지하며 후보를 사퇴하였고, 선거는 군사혁명 지도자 박정희와 민주세력 단일후보 윤보선의 구도로 진척되었다.

총유권자 수는 1298만 5015명으로, 이 가운데 1103만 6175명(투표율 85%)이 투표에 참가해 박정희 후보가 470만 2640표(득표율 46.6%)를 얻어 454만 6614표(득표율 45.1%)를 얻은 윤보선 후보를 근소한 차로 이기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득표율 1.5%, 단 15만 표 차이로 따돌리면서 승리를 거둔 것은 득표율이나 득표수 차이로 역대 최저수준으로 대한민국 역대 대선 중 가장 치열한 승부로 평가된다.

선거가 가열됨에 따라 윤보선은 박정희 후보의 광복 직후 남조선노동당 활동 경력을 집요하게 문제 삼았다. 이에 박정희 후보 측에서는 매카시즘 공세라고 비판하면서 지금은 확실하게 전향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윤보선은 이에 그치지 않고 만주군관학교 입학 문제 등 친일 의혹까지 제기하였다. 오히려 이때의 색깔 논쟁 때문에 박정희의 반공 노선이 더욱 짙어지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야권 지식인 계층과 혁신계(진보진영)에서도 윤보선을 극우정치인으로 판단하고 지지세가 약해졌으며, 무엇보다도 이념 갈등에 의한 학살사건을 직접 겪었던 전라남도와 경상도, 제주도 투표자들의 마음을 박정희 쪽으로 완전히 실제 이 투표에서 박정희는 전남에서 득표율 70%, 제주에서 득표율 80%이라는 엄청난 득표를 거둔다.

윤보선은 부정선거와 관권선거가 자행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생각해서 “내가 사실상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대통령 선거 한 달여가 경과된 1963년 11월 26일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주공화당은 총 득표수의 3분의 1을 간신히 넘는 33.5%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전체 175개 의석 중 110석을 차지하여 압승을 거둔다. 민주공화당이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선거자금을 사용했던 점과 야당이 11개로 분열되어 선거구당 평균 6명이 입후보하는 등 야당의 난맥상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선거에서 비극적 현실은 공화당 공천으로 출마한 前 자유 당원들이 모두 당선됨으로써 공화당이 이승만 정권의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선거에서 윤보선은 서울 종로구에서 민정당의 전국구 후보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야당 지도자로 본격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특히 1964년에 들어 박정희 정부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던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협상은 야당진영에서 윤보선의 지도력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윤보선과 민정당은 한일회담을 일종의 매국외교로 규정하고 그 타결을 전면적으로 저지할 것을 결의한다. 윤보선은 일본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잇던 지식인, 대학생, 일반시민의 호응을 얻어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모든 비판적 세력을 결집시켜 소위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1965년 5월, 한일회담에 반대하며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위해 자신이 만든 ‘민정당’을 민주당과 통합하고,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고문에 선출됐다. 장택상,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굴욕외교 반대 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1965년 6월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무기한 단식투쟁을 감행하다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 박정희와 재대결 낙선…민주화 투쟁에 앞장
윤보선은 1966년 3월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1967년 2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 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민중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한 후 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이 선거는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변신하여 4년간 집권한 박정희와 그에 강력히 도전해 온 윤보선과의 재대결이자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의 대결이었다. 박정희의 1차 방어전과 윤보선의 설욕전으로 관심을 모았는데 박정희는 4년간의 집권으로 유권자에게 친숙한 상태였고 윤보선은 역사의 한편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1967년 5월 3일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제6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는 5,688,666표를 윤보선은 4,526,541표를 획득하여 박정희가 1,162,125표차로 이겼다.

박정희는 윤보선보다 경북에서 63,685표, 경남에서 55,688표 등 경상도에서만 119,373을 더 확보하였다. 경상도권인 부산에서도 174,058표를 더 추가했다.

제5대 선거에서는 경기도를 비롯하여 여당 성향이었던 전라남도, 전라북도가 제6대 선거에서는 근소하지만 야당우세로 돌아섰다. 이로써 동쪽 영동의 강원, 충북과 영남의 경남·북, 부산의 여당지지로, 서울과 경기, 충남, 전남·북이 야권지지로 나뉘어 '동여서야‘(東與西野)의 형세가 나타났다.

윤보선은 1970년대의 이른바 유신 정국에서 야당투쟁의 지도자로서 3.1 구국 선언,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는 대단한 용기를 보여주었는데, 타협보다는 언제나 선명성을 강조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는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때문에 윤보선의 출석교회였던 안동교회(안국동 소재)는 형사들의 감시대상중 하나였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신민당을 탈당하여 박기출·장준하와 함께 국민당(國民黨)을 창당하고 총재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1972년 강제 해산 당했다. 1976년에는 3·1 명동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였으며, 1979년 신민당 총재상임고문으로 활동하다 정계에서 은퇴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는 당시 야당의 거물이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자택으로 불러 야권단일화를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5년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직을 지냈으며,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85년 경희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와 미국 국제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7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94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著書로는 ‘구국(救國)의 가시밭길’ ‘외로운 선택의 나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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