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거사-6> 제2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선거사-6> 제2대 대통령 선거
  • S. doctor 김
  • 승인 2012.10.22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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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대통령 선거

1952년 7월 7일 정·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정헌법이 공포되고 8월 5일 선거가 실시된다. 선거 방식은 국민의 직접 선거로 최다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 후보로는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을 비롯해 무소속의 조봉암 · 이시영 · 신흥우 네 명이 출마한다.

▲ 이승만 前 대통령 @ Newsis
선거 결과 이승만이 유효투표수의 74.6%인 523만 8,769표를 얻어 당선되고 이어 조봉암은 79만 7,504표, 이시영은 76만 4,715표, 신흥우는 21만 9,696표를 얻고 무효는 25만 5,199표, 기권은 98만 3,545표를 기록한다. 무효표와 기권표가 많은 사유로는 최초로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 대한 국민의 이해 부족과 전시 상황으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듯하다.

이 선거가 비록 한국전쟁 중에 실시되었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숨어있다. 발췌개헌안이 통과되고 선거를 실시한 과정으로, 1952년 7월 19일 자유당은 대전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에 그리고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

아울러 이날을 기점으로 일주일 후인 7월 26일까지 후보 등록을 마감하도록 하고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 즉 직접선거제 개헌에서부터 선거일까지 1개월, 선거운동 기간은 불과 10일에 불과했다. 이는 이승만의 의도가, 다른 후보들이 채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서 혼자 질주하겠다는, 반영된 것이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이승만의 계략과 선거의 흐름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자유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또한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아울러 그 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한다. 그러나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자신이 너무 고령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하라는 말과 함께 자유당의 지명을 거부한다.

▲ 조봉암
비록 전당대회가 열리기 전인 7월 6일 경무대를 방문한 민중자결단 시군대표 및 지방의회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마친 뒤에는 일개 시민으로 충성을 다 바치겠다’며 차기 대통령 불출마를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부산정치 파동까지 일으켜 헌법을 바꾼 그의 돌연한 태도 변화는 부산정치 파동 이상으로 정국을 뒤흔들었다.

이승만의 모호한 태도는 두 가지로 풀이될 수 있다. 첫째, 국제적인 파문까지 일으키며 무리수를 두었던 개헌에 대한 일종의 희석 효과를 노렸다 할 수 있다. 불가피한 개헌과 그에 따른 책임 역시 함께 짊어지겠다는 정치적 제스처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두 번째는 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범석에 대한 견제였다. 당시 이범석은 자유당의 실제 주인이라 할 만큼 많은 지분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살피면 이범석은 이승만의 스타일과 흡사한 측면이 있었고, 그런 점이 독주를 목표로 하는 이승만에게는 자칫 걸림돌로 작용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정치 행위로 풀이된다.

여하튼 이승만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자유당은 각 지방의회로 하여금 이승만에게 재출마를 간청하는 호소문을 작성해서 보내도록 했고 민중자결단 등 각종 관제데모대로 하여금 밤늦도록 대통령 임시 관저 앞에서 출마를 촉구하는 연좌데모를 하도록 했다.

이어 전국 방방곡곡 각계각층에서 재출마를 요청하는 탄원서가 밀려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민중자결단 시군대표들이 300만 명이 넘는 유권자가 서명 · 날인한 연판장을 가지고 대통령 출마를 권고하기에 이른다.
연이은 재출마 요구에 이승만은 마지못해 전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식의 담화를 발표하며 입후보 등록 마감일인 7월 26일에 등록을 마친다. 그러나 이범석 부통령 후보에 대해서는 지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어 이승만, 조봉암, 이시영, 신흥우의 네 후보가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하나 한국전쟁 중에 급하게 실시된 2대 대통령 선거는 야당 후보들에게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이 많았다. 신흥우 후보는 대통령에 출마했는지조차 모르는 지경에 이르고 이시영 후보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조봉암 후보만이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대통령 선거에 임한다. 이 과정에서 흥미 있는 기록이 전한다. 많은 사람들이 조봉암과 이시영의 후보 단일화를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사연이다.

조봉암이 출마에 앞서 이시영을 방문하여 출마 여부를 타진했다. 그러나 이시영은 자신은 의향이 없으니 조봉암에게 출마토록 권유한다. 그에 따라 조봉암은 민중을 위해 자신이 출마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조봉암과 숙적 관계에 있던 민국당이 급하게 움직인다. 조봉암이 야당을 대표하게 하면 안 된다는 논리였고 이시영에게 출마를 권유하기에 이른다. 이시영은 민국당의 요구에 덕이 부족함을 이유로 사양하나 거듭된 요청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후보 단일화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범석 제거와 이기붕의 등장

▲ 이범석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나선 이범석이 떨어지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목사 출신의 함태영이 당선되는 진기록이 펼쳐진다. 이는 다분히 이승만의 의도에 따른 결과였다. 즉 이승만은 자당의 이범석이 아닌 무소속의 함태영을 지원하여 이범석 거세 작업에 서막을 올린다. 당시 자유당의 주도권은 족청계가 잡고 있었다. 조선민족청년단은 1946년 이범석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청년운동단체였고 결국 이승만은 자유당에서 족청계를 견제하겠다는 의도로 이범석을 제거하기로 한다.

이범석은 내무부 장관 재직 중 부산에서 발생한 부산정치파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했었다. 그는 부산정치파동에서 발생했던 국회의원 간의 정쟁을 부정적인 시각, 즉 국민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입장은 대변하지 않고 이권다툼과 정권장악에 혈안이 된 것으로 해석하고 그에 대처했었다.

그런 연유로 밀명을 내려 부산의 임시 국회의사당(문화극장)에 경찰관들을 파견한다. 이범석의 밀명을 받은 경찰관들은 국회를 포위하고 그 주위를 다시 정체불명의 폭력 시위대들이 에워쌈으로써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이른다. 그런 이범석이 정· 부통령 직선제가 통과되자 부통령으로 출마한다. 이범석은 민족청년단의 강력한 조직력을 활용하여 자신이 이승만 박사를 잘 보필할 것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선거 운동을 함으로써 당선이 유력시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이범석과 족청계는 개헌 과정에서는 필요하였지만 개헌 목표가 달성된 뒤에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고 그에 따라 경찰에 그의 부통령 당선 방해 지령을 하달한다. 이승만과 국무총리 장택상이 개헌의 일등 공신인 이범석을 떨어뜨리고 함태영을 당선시키는데 앞장서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에 경찰이 깊이 개입한 사실을 규탄하며 선거에 개입한 장택상을 고소하기까지 한다.

이승만이 이범석을 배제시키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영향 역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미국은 이승만을 대신할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한국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에서 이승만 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그 대신 미국은 이승만을 주변의 과격한 세력들로부터 격리시키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그런 연유로 이승만 주변의 과격한 인물로 이범석, 원용덕, 임영신, 윤치영, 안호상 등을 거론하고 이범석을 그 핵심으로 지목했다.

결국 미국은 이범석이 부산정치파동 시에 보인 성향을 살피며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데 미국의 시각은 당시 이범석이 경찰조직과 대중조직을 장악하고 테러와 공포 정치를 자행한 것으로 간주했다. 범석의 제거를 원하는 미국의 의도와 그를 견제하려는 이승만의 의도가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이승만은 자당의 후보가 아닌 무소속의 함태영을 공권력을 동원하여 당선시키기에 이른다.

그 후 이승만은 이범석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당수제를 총재제로 바꾸어 이범석의 부당수직을 박탈하고 이어 1953년 9월 12일 이승만의 노골적인‘족청계 축출과 당의 정화 및 재건’지시에 따라 족청계는 이범석을 비롯하여 모두 축출되었고 새로이 총무부장에 임명된 이기붕이 실권을 잡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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