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거사-8> 제3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선거사-8> 제3대 대통령 선거
  • S. doctor 김
  • 승인 2012.11.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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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대통령 선거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에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중임 제한이 철폐된 자유당의 이승만과 민주당의 신익희, 무소속의 조봉암이 출마한다. 그러나 선거운동 기간 도중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뇌일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결과 이승만과 조봉암의 양자 대결에서 이승만 후보가 504만 6,437표(득표율 70.0%)를 얻어 당선된다. 조봉암 후보는 216만 3,808표를 얻었고, 무효는 185만 6,818표, 기권은 53만 9,807표를 기록했다.

이 선거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무효표와 기권표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는 신익희 후보의 사망에 따른 추모 투표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야당세가 상대적으로 강한 서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서울은 투표자수 608,741명 중에 284,359명이 무효표를 던져 유효투표율은 53.8%밖에 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무소속 조봉암 후보의 약진을 들 수 있다. 이는 일부의 유권자들이 이승만에게 유일하게 대결할 수 있었던 무소속의 조봉암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결과로 풀이된다. 조봉암은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11.3%의 득표율을 기록하나 제3대 선거에서는 30%의 득표율을 기록한다.

이승만의 고도 전략

1956년 3월 5일 자유당은 임시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대통령 후보에 총재인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중앙위원회 의장인 이기붕을 지명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 된 당일 자유당에 서한을 보낸다. ‘두 번까지 나라에 봉사한 뒤에는 물러앉는 것이 옳다. 그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요지였다. 다분히 포석이 깔려있는 행태였다. 국민적 반감을 사고 있는 사사오입 개헌에 대한 희석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국민적 여망에 따라 대통령을 다시 하겠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기붕은 일시적으로 혼란에 휩싸인다.

이전의 경험, 즉 2대 대통령선거 시 이범석을 염두에 두었던 행태의 재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자신이 부통령직을 사퇴하더라도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해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한다. 뒤이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음 날부터 국민회 · 노총 · 부인회 등이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민의를 전한다는 목적으로 서울로 상경하고, 전국 각지에서 경무대로 민의가 전달되었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을 철회하라는 구호와 전단이 거리에 난무했고, 지방에서는 초등학교 학생까지 이승만의 출마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경무대 앞은 경찰의 방조 속에 연일 시위 군중들로 가득 찼다. 그에 부응이라도 하듯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강권하는 서울 시내의 집회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위로하는 제스처를 구사한다. 이어 전국 각지에서 자유당 · 국민회 · 애련 · 노동조합 등 친위단체들의 주최로 ‘이 대통령 3선 출마 호소 궐기대회’가 열리고,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노총 · 대한노총의 정치파업이 있자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결국 이승만은 3월 10일 외신 기자들에게 ‘국민이 자살을 원한다면 자살이라도 하겠다’고 말하며 민의 수용 의사를 표명한다.

이 과정에서 기상천외한 일이 발생한다. 우마차 조합에서 우마차 8백 대를 동원하여 소와 말까지 이승만의 출마를 원한다는 행사를 개최한다. 결국 행사에 동원된 소와 말로 인해 서울 거리는 똥바다가 되었고 이에 이승만은 민의는 글로 써도 된다고 타이른다. 그래서 민의가 아니라 우의(牛意) ․ 마의(馬意)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이렇듯 어용관제대회가 지속되자 3월 23일 이승만은 자신의 본심을 드러낸다.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내가 세상에 공포한 뒤, 근 17일 동안에 걸쳐 재출마를 권하기 위하여 서울 부근을 위시해서 각도에서 대표를 보내왔습니다. 모두들 혈서와 진정서 등으로 많은 사람이 연명해서 보내온 것이…… 진정서와 결의문만 해도 2만 2천여 통, 거기 서명한 사람의 수가 3백만 명에 달했고, 지금까지 받은 전보는 전부 8천여 통입니다......’

이승만은 이 담화와 함께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선거 비용으로 백만 환 이상 쓰지 못하도록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하면서 야당에 대한 우회적인 압박을 가하고 나섰다.

한편 이승만의 정치 조작을 훤히 간파하고 있던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는 자당 의원들로 하여금 국회에서 내무장관을 불러 정부가 강제적으로 민중을 동원한 일을 따지자는 동의안을 의회에 제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자유당은 다수의 힘을 이용해서 동의안을 폐기시켜버린다. 이에 민주당은 내무부 장관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나 자유당은 그를 묵살하고 3월 27일 5.15 정부통령 선거를 공고한다.

야당 후보 단일화

▲ @ Newsis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가 고민에 빠져든다. 서울 한강변에서의 첫 유세에 시민들의 호응이 미진한 데 따른 결과였다. 또한 당시 자유당의 이승만 정권을 이기기 위해서는 야당 후보가 단일화되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조봉암 역시 야당 후보단일화에 대해 인정하고 있었고 그에 4월 3일 두 당이 후보지명을 백지화하고 새로 연합후보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속내는 달랐다. 원내 다수당이니 만큼 조봉암 측이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에 응하지 않았다. 당의 입장과는 달리 신익희는 그를 협의하기 위해 조봉암과 비밀회동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 양보의 뜻을 밝히고 부통령 후보는 중요하지 않으니 조봉암 자신에게 양보해달라는 의사를 전했다.

신익희는 고려해보겠다고 했으나 민주당 측은 부통령 후보도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결말을 보지 못한 야당 단일화 협상은 5월로 이어졌는데 중간에 민주당 원로들이 참여하면서 협상의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단일화 협상은 난항에 부딪치고 각자 선거 유세 활동을 하는 중에 신익희 후보에게 변고가 발생한다. 신익희 후보는 건강에 유의하라는 주위의 만류를 무시하고 4월 내내 열차와 고속버스 편으로 전국 순회유세를 강행하였다. 특히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유세는 어느 누구도 예측 못한 성황을 이루었다. 근 50여만 명의 시민이 운집하여 행사 시작 전부터 남대문에서 한강으로 가는 길이 마비될 정도였다.

이승만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던 그날 유세에서 자신의 건강을 고려하지 않고 장시간의 선거 유세를 했고 환호에 고무된 신익희는 연설을 마치고 효자동 자택으로 돌아간 뒤에 이상 징후를 보였다. 그를 살피던 주변 사람들이 당분간 지방유세를 중지해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당에서는 그를 묵살하고 호남 유세를 결정한다. 그에 따라 1956년 5월 5일 새벽 5시경,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지방 유세를 위해 호남선 열차를 타고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침대에 걸터앉아 넥타이를 매다가 갑자기 고개를 떨어뜨린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신익희는 열차 안에서 홍차를 마신 뒤, 종손이자 비서인 신창현에게 휴지를 달래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쓰러졌다. 결과는 뇌일혈로 인한 졸도였다. 수행원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의사를 찾았지만 기차 안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신익희는 졸도한 상태로 이리역에 도착하여 역 가까이 있는 호남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신익희 후보가 사망하자 야당의 대통령 후보는 결과적으로 단일화된다. 그를 살핀 조봉암이 부통령 역시 단일화하여 국민에게 야당후보 단일화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자며 자신의 러닝메이트인 박기출로 하여금 후보를 사퇴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통령 후보는 조봉암,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 후보로 단일화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했다. 그러나 신익희 사후 민주당의 태도는 조봉암에 대해 완고했다. 모 최고위원은 용공적인 조봉암에게는 단 한 표도 줄 수 없다는 공언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민주당은 ‘민주당 중앙선대위’ 명의로 5월 11일 ‘대통령선거 투표에 대한 해명’이란 성명서를 발표한다.

‘대통령 선거에 관해 우리 당에서는 어떠한 후보자도 지지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작고한 신익희 선생에게 투표를 하고 말고는 자유다. 그러나 그 투표는 무효 처리 될 것이지만 불법은 아니며 일종의 정치적인 의사표시가 될 것이다.’

조봉암의 분전

‘못 살겠다. 갈아 보자!’
민주당의 구호에 자유당이 되받아친다.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갈아봤자 더 못산다!’
조봉암이 가세한다.
‘이것저것 다 보았다, 혁신밖에 살 길 없다!’

단지 구호만 난무하던 선거가 아니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최초로 네거티브 전략이 등장한 선거였다. 자유당의 이승만은 조봉암을 좌익으로 몰았고 또 민주당은 조봉암 후보에 대해 대권병 환자로 몰아세웠다. 민주당의 주장에는 2회에 걸친 그의 출마를 문제 삼아 야당 후보 단일화에 대한 압박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여하튼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 선거는 2파전으로 압축된다. 그런 연유로 신익희라는 강적이 사라진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 측은 느긋한 자세에서 선거를 치러나간다. 비록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를 이루려는 이승만 후보 측에서 부정· 불법 선거가 있었다는 시비가 일어났지만, 조봉암 후보는 216만 3,808표를 얻어 지난 2대 대통령 선거에서 득표한 수의 20%를 상회하는 기록을 세운다.

물론 조봉암 후보의 선전에 신익희 후보의 사망에 따른 이승만에 대한 견제가 작용했지만 이 분전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봉암은 후일 결국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서 흥미를 끄는 부분이 있다. 조봉암은 1954년 실시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는데 이는 다분히 야당표의 분산을 위한 이승만의 전략에 따른 결과로 풀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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