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거사-13> 제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선거사-13> 제5대 대통령 선거
  • S. doctor 김
  • 승인 2012.12.1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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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대통령 선거

▲ 국정홍보처
1962년 국가재건 최고위원회의 헌법 개정으로 내각책임제가 대통령중심제로 바뀌고 양원제 국회가 단원제로 바뀐다. 그 개정 헌법에 따라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방식을 채택하였고 후보로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민정당의 윤보선, 신흥당의 장이석, 추풍회의 오재영, 정민회의 변영태, 국민의 당의 허정, 자유민주당의 송요찬의 일곱 명이 등록한다.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470만 2,640표(득표율 46.6%)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고, 윤보선 후보는 454만 6,614표(득표율 45.1%), 오재영 40만 8,664표, 변영태는 22만 4,443표, 장이석은 19만 8,837표를 획득한다. 반면 허정과 송요찬은 선거 도중 사퇴한다.

야당의 후보 단일화

5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야당 후보들은 군정종식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출발했다. 그런 선상에서 야당 후보의 단일화는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과제였다. 또한 다수의 국민이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야당 후보 단일화는 필연이라고 믿고 있고 그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민정당은 5월 14일 전당대회서 김병로를 당 대표 최고위원으로 그리고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일찌감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민정당에 대해 타 야당이 대통령 후보 단일화 안을 들고 나서자, 7월 5일 민정당 윤보선 후보가 단일야당을 형성하여 군정을 매듭짓기 위해 대통령 공천 지명을 사퇴한다고 밝힌다.

이어 8월 1일 단일 야당을 목표로 민정당의 일부, 전 자유당계와 족청계를 중심으로 안호상을 의장으로 선출 이범석이 고문으로 참여한 민우당, 허정이 이끄는 신정당 등 야 3당의 통합으로‘국민의 당’이 출범한다.

출범한 국민의 당이 지구당 조직책 선정과정에서 이견을 보이기 시작하자 윤보선 씨가 8월 27일 민정당의 국민의 당에 거당적 참여를 위하여 대통령 불출마와 아울러 김도연 지지를 표명한다.

그러나 9월 3일 재야 정치지도자회의(당시 각 야당 대표인 김병로, 허정, 김도연, 백남훈, 장택상, 김준연 등) 및 민주당이 주동이 된 ‘야당 단일 대통령 추진협의회’ 연석회의에서 김도연을 제치고 허정이 후보로 결정된다.

이 상황에 이르자 9월 4일 김도연은‘국민여론이 윤보선 씨를 적극 지지하고 있고 박정희 의장과 싸우기 위해서는 윤보선을 가장 강력한 야당 후보로 생각하기에 지원’한다며 윤보선에게 양보한다.

아울러 9월 5일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에서 민정당과 비 민정당 간의 극한 대립으로 대회가 무산되고, 9월 10일 민정당은 임시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다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

이어 국민의 당은 9월 14일 전당대회를 개최한다. 그 대회에서 유진산, 전진한, 윤제술 등 민정계 출신 대의원 다수의 자격을 정지시키고 대통령 후보로 허정을 선출한다.

결국 단일 야당 형성에 실패한 야권은 각자 후보를 선출하여 대선에 임한다. 그러나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던 10월 2일 국민의 당 허정 후보가 야당단일화를 통해 군정 종식을 바란다며 후보를 사퇴한다.

뒤를 이어 10월 7일 옥중에 있던 자민당의 송요찬 후보도 후보단일화의 명분을 걸고 대통령 후보를 사퇴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퇴는 이미 박정희와 윤보선 후보로 굳어진 선거 판세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상논쟁

▲ 국정홍보처
후보 단일화 문제로 야당이 뒤늦게 선거전에 참여하는데 반해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확고한 선거계획에 따라 일찌감치 득표 운동을 전개한다. 경제자립과 정치안정을 모토로 하는 공화당은 황소 그림에‘새 일꾼에 한 표 주어 황소같이 부려먹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이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윤보선 후보가 뒤늦게 선거전에 참여하였고 그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강행군을 펼치며 추격전에 박차를 가한다. 후보 단일화에 대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세에 청중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야당이 전통적으로 강했던 호남 유세에는 기대 이상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9월 21일 목포역 광장 유세에는 6만 명이 넘는 청중이 참여했고, 다음 날인 22일 광주 서광장 유세에는 1만 5천 명이 몰려드는 등 윤보선 후보에 대한 열기가 더해가기 시작했다.

그를 살피던 박정희 후보가 9월 23일 KBS 방송에 출연하여‘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적 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천명했다.

그러자 9월 24일 윤보선 후보는 전주유세에서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관련 좌익경력을 문제 삼으면서 본격적으로 사상논쟁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후 두 후보의 주된 논점은 사상전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사상 논쟁은 급기야 선거유세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막판에 이르러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에게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한 전력을 들며 색깔론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는 윤보선 후보의 커다란 오판으로 당시 호남 사람들의 반감을 사면서 급격하게 박정희 후보에게 표가 몰리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당시 박정희 후보의 선거사무장 겸 선거대책본부 본부장으로 있던 윤치영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당하기 시작한다. 윤보선은 윤치영의 둘째 형인 윤치소의 아들로 윤치영의 친조카였다.

이승만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던 윤치영은 장면 정권 때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5.16 이후인 1963년 초에 민주공화당에 입당한다. 그는 박정희의 정치 스승이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민주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추천하였으며 민정에 참여토록 하는데 주요 역할을 했다.

아울러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자 민주공화당 의장으로서 박정희의 선거사무장 겸 선거대책본부 본부장으로 전국 순회강연, 유세를 다니고 있던 터였다. 그런 과정에 윤보선이 박정희에 대해‘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으며 박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며 박정희의 사상에 대해 논란을 지피자 윤치영이 바로 반격에 나선다.

지원 유세를 위해 광주를 방문한 윤치영이 작심하고 포문을 연다.

‘만약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몇 달 내에 또 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만약 혁명을 일으키는 자가 없다면 나라도 일으키겠다. 이번 선거는 사대사상과 민족자주사상과의 대결인 사상전이다.’

아울러‘문제가 되는 여순반란사건 당시 내가 내무부 장관이라 그 실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데 그저 일소에 붙이고 만다.’

사상전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선거 행태로 인해 영남 지방에서 기어코 한 사건이 발생한다. 10월 10일 경북 영주의 민정당 유세장에서의 일이다. 연사로 나선 김사만 의원이 청중들을 향해 지원유세를 하며 거침없이 내뱉는다.

‘부산과 대구에 빨갱이가 많다. 그러니 북한의 김일성이 오면 만세부를 것이다.’

김사만의 유세 내용이 보도되자 이후 민정당은 그야말로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다음 날인 11일 민정당사가 재일의용군 일곱 명에 의해 습격당하고 서범석 의원이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울러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영우회’명의로 규탄 벽보가 나붙기 시작하고 당시 민정당 대변인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과하느라 진땀 빼기에 이른다.

여하튼 사상 논쟁으로 인해 추풍령을 중심으로 위쪽은 윤보선, 아래쪽으로는 박정희 후보가 압승하는 결과를 일구어낸다.

당시 개표 결과를 살피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서울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37만 2천여표, 윤보선 후보가 80만 2천여표를 득표하여 박정희 후보가 완전 열세를 기록한다. 그러나 호남에서 박정희 117만 4천여표, 윤보선 82만 4천여표를 부산과 영남에서 박정희는 178만 6천여표, 윤보선은 112만 3천여표를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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