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거사-18> 제7대 대통령 선거 (2)
<대한민국 선거사-18> 제7대 대통령 선거 (2)
  • S. doctor 김
  • 승인 2013.01.1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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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뉴스]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일찌감치, 1970년 10월 16일 기자회견을 열어 향토예비군을 전면 폐지, 할슈타인 원칙을 폐지하고 비적성공산국가들과 영사 및 통상관계를 가질 것이며 한국의 방위는 미국· 소련· 중국· 일본 등 4대국의 보장에 의존해야 한다는 등 안보 문제를 들고 나왔다.

향토예비군 폐지 문제는 향토예비군이 정치도구로 전락했고 국민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고 그 사유를 설명하고 나섰다. 그러자 자당인 신민당의 국방위원회 소속 서범석 의원은 전혀 비현실적이라며 반대 의사를 밝히고 나서자 김대중 역시 그를 절감하며 철회하고 다시 대체법안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할슈타인 원칙은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당시 서독의 외교상 원칙으로 할슈타인 원칙 폐지는 북한과 외교를 맺고 있는 국가들과의 수교를 의미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안전을 미국· 소련· 중국· 일본 4대국의 보장에 의존하자고 했는데 그야말로 선동에 가까운 정략에 그치고 만다. 당시 최규하 외무 장관은 김대중의 안보 공약과 할슈타인 원칙 폐지 공약에 대해 명백하게 거부 의사를 밝히며 일축하고 만다.

당시 대북관련 문제는 모든 사람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즉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군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고, 푸에블로호 납치사건(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해군초계정에 의해 납치된 사건), 또 북한이 미군 정찰기 EC-121를 격추한 사건(1969년 4월 15일 미군 첩보기인 EC-131기가 동해상에서 북한측에 의해 격추된 사건) 등이 일어났었다.

북한의 연속적인 도발에 대해 국민들이 북한에 대해 악감정을 지니고 있던 터였는데 김대중의 우리의 안보를 소련과 중국의 공산국가들이 포함된 4대국의 보장에 맡기자는 제안은 무책임한 논리로 인식되었다.

안보문제를 거론했던 김대중의 오판은 여론의 질책을 받고 특히 1971년 1월 23일에 강릉발 서울행 KAL여객기 납북 미수사건이 일어나자 수면 하로 잠기며 오히려 선거전이 본격화되자 공화당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안보론을 제기했다가 실패를 맛본 김대중은 1971년 3월에 이르자 개정된 헌법의 내용에 대한 해석을 문제로 부각시킨다. 헌법 제69조 3항에 기록된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삼기에 한한다.’와 개정헌법 부칙에 기록된 ‘이 법은 공포한 날부터 시행한다.’라는 조항이 맞물리면서 일어난다.

이러한 논란에 백남억 당시 공화당 의장 서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차기 출마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개진한다. 그러나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정략적인 차원인지 진정으로 차기의 일을 예측했는지 그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고 나선다.

‘법률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현 임기 외에 앞으로 계속 2선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되나 문제는 75년에 다시 출마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영구집권을 꾀하려고 하는데 있다’ 며 ‘이번 기회에 기어이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저지하지 않으면 영구집권을 막지 못할 뿐 아니라 정권교체 가능성은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 언명한다.

아울러 김대중은 삼선 조항을 다시 원상으로 복구하는 개헌안을 50만 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발의로 개헌하겠다고 나섰다. 이 일은 다분히 정략적인 의도로 비추어졌다. 이른바 선거전의 이슈였다.

개헌을 선거전에 최대 이슈로 삼아 서면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민의 관심을 유도하고 공화당이 삼선개헌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71년부터 또 다시 삼선에 출마하면서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을 유발하고 그를 통해 정부 여당과 마찰이 발생하면서 국민의 동정심을 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와 아울러 김대중은 호남의 민심을 자극한다. 지난 대선에 이미 불거진 호남 푸대접을 확산시켜나가면서 호남의 몰표를 유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역으로 영남권의 민심을 자극하고 영남에서는 경북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몰표를 안겨주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건 사고 및 김대중 어록

71년 1월 17일 김포 강화에서 일명 김포 강화 사건이 발생한다.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 일행과 그곳 경찰들 간에 발생한 충돌사건으로 경찰관이 폭행을 당하고 심지어 총까지 빼앗기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김대중 후보와 일행이 강연 장소인 강화극장으로 가던 중에 대회 장소에 모여드는 청중들을 정리하던 경찰관 두 명이 청중이 몰려드는 것을 방해한다는 사유로 경호원들에 의해 뭇매를 당한다.

이어 강연을 마치고 김포로 가던 도중 불심검문을 당하자 경호원들이 불심검문을 하던 경찰관을 대통령 후보도 모른다면서 집단으로 폭행을 가하고 경찰관이 지니고 있던 카빈 총 한 자루와 실탄 50발을 빼앗았다.

이어 강연 도중 김대중 후보의 강연 내용을 녹음하던 경찰관이 또 다시 폭행을 당하고 녹음기까지 빼앗기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일로 관련자들이 구속당하자 공화당은 이에 대해 폭력적인 선거운동 방식이라 하고, 신민당은 야당 탄압이라 들고 나선다.

또한 김대중 후보가 미국을 방문중인 71년 1월 28일에 김대중 신민당 후보 집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 대해 신민당은 즉각 테러로 규정하고 정부 여당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면서 김대중 후보의 가정부였던 여인으로부터 평소 장난감 화약총을 즐겨 사용하던 김대중의 조카인 김홍준이 관여되었음을 알아챈 수사진은 범인으로 김홍준을 지목하고 자백을 받아낸다.

이어 2월 5일 새벽에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인 정일형 의원 집 별채에 화재가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불로 30평에 이르는 별채가 전소되고 1시간 30분 만에 진화되었으나 이 화재로 인해 신민당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대책 계획서와 신민당 관계 비밀서류, 서울 중구 지구당 관계서류, 장서 5,000여권이 불에 탔다.

경찰은 처음에 고양이에 의한 화재로 발표하였다가 후에 당사 사환인 박모군(19세)의 실화로 단정하고 그를 구속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2일 후인 7일에 정일형 의원 앞으로 협박 편지 세 통이 날아온다. 편지의 내용은 화재사건에 대해 연연해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다음 차례는 이철승 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다음날인 2월 8일 신민당 이재형 고문이 신민당을 탈당한다. 신민당은 정권을 교체할 의사도 능력도 그리고 자격도 없는 집단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탈당하여 일시적으로 침체 분위기에 휩싸이나, 2월 19일 박정훈· 한광옥· 김덕규· 조홍규 등 6․3세대 20여 명이 신민당에 입당한다.

   다음은 선거 기간 중 김대중 후보의 주요 발언 내용이다.
■ 이번에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앞으로는 선거조차 없는 총통제의 일인 영구집권시대가 다가올 것이고 나는 그에 관한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 향토예비군과 대학교의 교련은 국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독재체제 강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 공화당은 신민당이 집권 능력이 없다고 말하지만 5.16 당시 박정희 씨는 소장으로 국민이 이름도 몰랐으나 나는 정치에서 박정희 씨보다 십년 선배다.
■ 박대통령은 이억 이상 삼백 오십억 원까지의 부정축재자 명단을 가지고 있으나 이 사람들을 처벌하다가는 공화당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다 없어지니까 손도 못 대고 있다.
■ 공화당은 박정희 씨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데 박 대통령이 내일 돌아가기라도 한다면 대한민국의 간판을 내려야 할 일 아닌가.
■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은 부정선거를 중단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집권하면 법에 따라 최고의 벌을 받을 각오를 하라.
■ 나는 이번 선거에 승리하며 여러분도 승리한다. 여러분의 성원으로 정권교체가 확실하니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7월 1일 청와대에서 만나자.

김대중과 엄창록

후일 선거가 끝난 후 당시 김대중의 핵심참모로 참여했었던 김상현이 선거 패인으로 가장 먼저 지목한 일이 공화당이 엄창록에 대한 회유에 성공한 점을 들었다.

엄창록은 선거의 달인, 선거의 귀재로 불리던 인물로 김대중 자택의 화제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김대중의 조직특보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강원도 인제의 5대 선거부터 6, 7대 선거까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김대중을 당선시킨 그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 있었다. 지난 7대 총선에서 목포에서 패배한 공화당의 김병삼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활동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1967년 고창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 기술자로 파견가면서 알려지게 된다. 그를 기회로 급기야 중앙정보부까지 알려져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격리대상 1호로 선정된다.

특히 지금 표현으로 마터도어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는데 그가 구사한 전략은 자해극 소동을 비롯하여 유권자의 집에 찾아가 상대 후보 선거운동원이라며 돈 봉투를 건넨 뒤 다시 찾아가 잘못 전달됐다며 되돌려 받기. 지프차로 보리밭을 짓이겨 놓고 상대 후보 차량인데 고장이 났다고 둘러댄 뒤 도망치기. 상대 후보의 유세장에 나오면 돈 봉투를 준다고 선전해놓고서 헛걸음시키기. 기분 상하게 적은 액수의 돈 봉투를 돌리며 상대 후보가 주는 것이라고 생색만 내기. 상대 후보 명의로 음식점에 많은 자리를 예약해 놓고 펑크 내기. 상대 후보 명의로 동네 두 세집에만 돈 봉투를 돌리고 온 동네에 소문내기 등 무궁무진했다. 결국 상대 후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렴치한으로 둔갑되고는 했다.

하여 중앙정보부는 김대중 후보의 집 화재사건을 빌미로 조사를 한다는 구실 하에 많은 사람들을 조사하는 중에 엄창록을 소환하여 집중적으로 회유하기 시작한다. 한동안 완고한 입장을 굽히지 않던 그가 대통령 선거 투표일 10여 일을 앞두고 신민당의 선거 참모회의에서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신민당이 지역감정에 호소하며 호남에서 유세를 펼칠 즈음 부산과 경남에 전봇대마다 다음과 같은 포스터가 달라붙는다.

‘호남인들이여, 대동단결하여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오해

다수의 사람들이 7대 대통령 선거 결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을 제거하기 시작했다고 믿고 있다. 아울러 동 선거를 김대중의 선전으로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신승(辛勝)이라고 강변한다.

과연 그게 사실인지 파악하기 위해 지난 선거 결과를 살펴보자. 먼저 5대 대통령 선거 결과다. 박정희 대통령은 470만 2,640표를 획득하고 윤보선 후보는 454만 6,614표를 획득한다. 이를 살피면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를 단지 15만 5,926표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6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살펴보자. 선거 결과 박정희 대통령은 568만 8,666표 그리고 윤보선 후보는 452만 6,541표를 얻어 박정희 대통령이 116만 2,115표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어 7대 대통령 선거 결과 박정희 대통령은 634만 2,828표를 얻어 539만 5,900표를 얻은 김대중 후보보다 94만 6,928표를 더 얻는다.

이제 선거의 흐름을 살펴보자. 신민당의 김대중은 1970년 9월 29일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면서 일찌감치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그에 반해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선거가 실시되기 40여 일 전인 1971년 3월 17일에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고 그 이후에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가 3월 23일 후보로 등록한 이후부터 선거운동에 임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통령직에 있었다는 프리미엄이 있지만 두 사람의 선거운동 기간은 그야말로 커다란 격차를 보이고 있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에 불어 닥친 사십대 기수론이라는 전국적인 거센 돌풍, 거기에 더하여 경선에 참여했던 김영삼과 이철승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94만 7천여 표로 낙선한다.

이런 경우라면 흔히 이야기하는 김대중의 선전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 속된 표현으로 참패라고 규정을 내려도 무방할 정도다. 그럼에도 선거가 끝나자마자 김대중은 동 선거를 불법선거로 규정내리기에 이른다.

이와 관련해서 7대 대통령 선거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행적을 살피면 박 대통령이 김대중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는 현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김대중이 아닌 김영삼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노출한다.

후일 밝혀지지만 1973년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도 박정희 대통령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통설에 따르면 10월 유신 발표 직전 일본으로 건너간 김대중이 반 박정희 운동을 전개하며 망명정부를 세워 대북 관계에 혼선을 조장하자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어 곤궁한 입장에 처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사태의 반전을 위해 독단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은 이 선거에 김대중이 선전을 펼쳤고 그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이 차기가 두려워 김대중을 제거하기로 했다고 믿는 걸까?

아마도 그 부분은 김대중 측에서 일부러 만들어 놓은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박정희에 대한 야당의 대항마는 오로지 자신이라는 인식을 심어 줌으로써 야당의 잠재적 대통령 후보인 김영삼과 이철승 등을 견제하고자 하는 전략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아울러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에 따라 7대 대통령 선거 결과로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을 제거하기로 했다면 윤보선 전 대통령은 5대 선거 후 제거되었어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논리에 봉착하게 된다.

S. doctor 김 블러그 바로가기 http://blog.daum.net/jwkim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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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대통령 선거 (2)

김대중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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