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거사-19>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선거사-19>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S. doctor 김
  • 승인 2013.01.2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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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고 약 한달 후인 1971년 5월 25일에 실시된다. 선거 방식은 7대 국회의원 선거와 마찬가지로 지역구와 전국구로 나누어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를 병용하였다.

이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의원 정수의 55.4%에 해당하는 113명(지역구 86, 전국구 27)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고, 신민당이 89명(지역구 65, 전국구 24), 국민당과 민중당이 각각 지역구 1명씩을 당선시켰다.

진산파동

7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신민당의 김대중은 4월 29일 김상현 비서실장을 통해 성명을 발표한다. 선거사상 유례없던 부정 불법선거였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발표하며 대선 결과에 승복할 수 없음을 천명한다.

‘공화당은 법정 선거자금인 9억 2천만 원의 몇 십 배를 사용했다. 관권이 총동원되어 불법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국가 예산이 선거를 위해 사용되고 지방 산업에 득표용으로 악용되었다. 야당계 유권자를 대량 누락시키고 친여 유권자는 이중 삼중으로 등재되었다. 투표 당일 릴레이 투표 등의 부정이 자행되었다. 개표 시 역시 철저한 부정이 자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신민당 일각에서 대통령 선거를 총선에 연계시켜 총선 참여를 거부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강경 기조에 지난 대선 기간 중인 4월 19일 종교인, 문인, 언론인 등 60여 명이 발족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주요한 역할을 하고 나선다. 5월 3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주최로 신민당을 제외한 국민당, 대중당 등 군소정당의 대표들이 만나 4.27 대통령 선거는 원천적으로 부정선거이므로 무효이고 아울러 5.25총선의 불참을 선언하며 신민당도 그에 동참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신민당은 5월 4일 김대중 후보와 유진산 대표 등이 만나 공화당 이외의 모든 정당이 합심해서 총선에 불참한다면 흔쾌히 참여할 것이며 그 방식은 신민당이 주장하던 일이었다고 힘주어 강변한다.

아울러 총선 불참 선언에 대해 양일동, 홍익표, 정일형으로 당내 대표단을 구성하고 협상에 임하도록 한다. 그러나 행동통일 등에 대해 군소정당들과의 의견 차이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결국 신민당 온건파들의 주도로 총선 전면 거부가 아니라 총선을 통해 지난 대선의 부정과 불법을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주지시키고 국회만이라도 신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해서 점진적으로 대여 투쟁을 병행해나가겠다는 전략으로 선회한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강경파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모든 출마자들에게 지난번과 같은 부정선거가 지속된다면 하시라도 선거를 보이콧하겠다는 각서를 받아 놓고 총선에 참여하게 되는 중에 이른바 진산 파동이 발생한다.

유진산 대표위원이 5· 25 국회의원 총선 후보등록 마감일인 1971년 5월 6일 갑자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갑 구를 29세의 무명 청년에게 일방적으로 넘겨주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는 일이 발생한다.

단순히 이 일, 유진산 당수의 전국구행은 크게 문제로 불거질 일은 아니었다. 당의 대표로서 총선을 진두지휘하고 또 각 지역의 지원유세 활동을 전개하려면 오히려 그 편이 타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울러 그 일이 있기 이틀 전에도 당 지도부 회의 시 양일동 부의장이 유진산의 전국구행을 권유한 바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완고했던 그의 입장의 변경 그리고 자신의 지역구를 생소한 젊은이에게 물려준 그 이면의 움직임 때문이다.

당시 영등포갑 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로 전 청와대 외자담당비서관인 장덕진이 공천을 받아 놓은 상태에서 유진산과 중앙정보부 간에 모종의 협의에 따른 조처였다는 설이 파다했다.

또한 지역구 여러 곳에도 유진산이 독단적으로 공천을 주었으며 전국구 당선권 안에 자신의 직계 세력을 대거 공천한 부분 때문에 당내 비주류 세력 특히 김대중 계의 불만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여하튼 유진산이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로 중앙선관위에 등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관위 밖에 있던 일부 신민당 청년 당원들은 극도로 흥분,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유진산은 자파 청년 당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봉변을 모면하지만 이 일이 기폭제가 되어 당내 소장층과 전국구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김대중 계를 비롯한 비주류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고 영등포갑 구 당원들 역시 강력하게 반발하여 당수직 사퇴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사건 발생 다음날 김대중의 집에서 김대중, 고흥문, 정일형, 홍익표 네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당 중진회의가 개최되고 그 자리에서 그들 4인은 유진산 당수의 제명과 김대중의 당수 권한 대행을 결의한다.

은거 중에 그 소식을 접한 유진산 당수가 이를 정면으로 뒤엎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김대중 집에서 개최된 4인 회의 결과는 불법이고 그를 통해 당권을 빼앗으려는 처사로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 이중재, 박영록 등 당 중진들의 중재로 유진산은 파동에 책임을 지고 당수직을 사퇴하고 총선기간 중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을 당수권한대행으로 정하며 선거에 임한다.

후의 일이지만 이어지는 총선에서 서울의 19개 선거구 중에서 신민당이 18석을 차지하여 압도적으로 승리하지만 영등포갑은 민주공화당의 장덕진 후보가 당선된다.

사건 사고

5.25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진행된 선거로 평가할 수 있다. 지난 7대 총선과 대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서 불거졌던 부정 선거의 행태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적극 나서서 시정을 요구했고 또한 진산 파동으로 인해 신민당의 약세를 감지한 공화당이 적극 대처하지 않은 점도 그 사유로 꼽을 수 있다.

지난 대선의 경우 신민당은 사십대 기수론을 앞세워 일찌감치 후보를 정하고 선거에 주도권을 잡고 움직였으나 진산 파동으로 인해 신민당의 총선 출발은 상당히 난항을 거듭한 끝에 이루어졌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선거가 진행되는 중에 학생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발생한다. 5월 11일 서울대 총학생회 명의로 4.27 대선과 관련하여 성명을 내고 야당은 5.25총선을 거부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지난 대선을 원천적으로 부정 선거로 몰아가면서 선거의 이슈로 끌어가려는 신민당의 총선 전략과 일맥상통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 5월 17일 신민당 지도부는 신민당의 지지도가 침체되자 긴급 회합을 가지고 다시 총선 거부 문제를 언급한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은 ‘현재의 선거 양상에 비추어 신민당의 선거 참여는 여당의 들러리를 서는 짓’이라며 강력하게 선거 거부를 주장한다. 그러나 김홍일 당수 대행 등은 이를 일축하고 총선에 더욱 활력을 기하기로 하고 전열을 새로 정비하자는 방안을 정한다.

이러한 과정에 5월 19일 서울대생들이 신민당 중앙당사를 찾아가 선거에 참여하지 말 것을 주장하며 농성하고 나오는 중에 구속되는 일까지 발생한다. 이를 시작으로 5월 21일 연세대학교 학생 300여 명이 구속학생 석방과 야당의 총선보이콧을 주장하며 연좌데모를 벌이기 시작한다.

또한 지난 69년 삼선개헌을 반대한다는 사유로 제명당했던 공화당 의원 출신인 예춘호가 부산 영도에서, 양순직은 충남 논산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으로부터 공화당 공천을 받고 출마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 신예였던 인사들에게 고배를 마신다. 이 부분에 중앙정보부의 공작이 개입되었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당시 공화당 의원으로 삼선개헌에 반대하고 제명당한 그들의 인기를 감안하여 신민당에서 거세게 유혹해오자 그 사실을 접한 중앙정보부가 그들과 야당 간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공천을 주고 낙선시켰다는 후문이다.

여하튼 이 선거에서 김대중의 적극적인 선거 거부 행태에도 불구하고 신민당은 지난 7대 총선 시 얻은 45석을 훨씬 넘어선 89석을 확보한다.

김대중 암살미수 사건

1971년 5월 25일, 김대중이 부인 이희호와 함께 투표를 위해 마포구 동교동 소정빌딩에 위치한 투표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전날 교통사고로 다친 오른팔에 팔걸이를 한 관계로 부인인 이희호가 주민등록증을 대신 제시하고 투표용지 교부 역시 대신하고 김대중은 왼손으로 투표용지를 함에 넣는다.

투표를 마친 그는 ‘어제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는 짧은 한마디를 한다. 아울러 투표를 마친 다음날 치료차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다.

그 사실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조상호 의전비서관을 통해 화환을 보내 위로하자 ‘박 대통령이 이렇게 따듯하게 위로하여주어 감사하다’고 답한다. 아울러 육영수 여사도 별도로 이희호에게 화환을 보내 위로의 말을 전한다. 이어 6월 2일 김대중은 선거의 피로를 포함하여 완쾌를 빌미로 퇴원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사건은 김대중에 의해 ‘정부가 자동차 사고를 빙자해서 나를 살해하려고 한 충돌 사건’으로 변한다.

경미한 사고가 한순간 김대중 암살 미수 사건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 과정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971년 5월 24일 아침 김대중은 호남지방 유세를 마치고 서울 영등포 지역 지원유세(오후 3시 예정)를 위해 목포에서 대한항공편 여객기로 출발하려 했다. 그러나 악천후로 결항이 되자 승용차를 이용 광주공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선두 차에 탑승한 김대중 일행이 무안군 삼향면 대양리 앞 국도를 지나는 중에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기 위한 사람들이 타고 있던 택시가 이들을 추월하고자 했다.

뒤를 따르던 차를 추월한 택시가 선두에서 달리던 김대중이 타고 있던 차를 추월하는 과정에서 미처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대형트럭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를 감지한 김대중의 운전기사가 피하기 위해 급하게 페달을 밟고 그 과정에 김대중이 타고 있던 차의 뒷부분과 순간적인 충돌이 일어나고 추월하려던 택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사건으로 김대중은 경미한 부상을 당하나 추월하다 정면으로 충돌한 택시는 운전자 등 3명이 즉사하고 3명이 부상당한다.』

당시 수사결과 그리고 김대중의 최측근으로 사고 현장에 함께했던 사람의 입을 빌리면 이게 정확한 실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교통사고, 경미한 사고로 인해 이후 김대중은 치료 명목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고 또 후일 지팡이를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일은, 생전에 이 사건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했던 김대중은 운명을 달리하기 얼마 전에 기록한 자신의 회고록에 이 부분은 거론하지 않는다.

S. doctor 김 블러그 바로가기 http://blog.daum.net/jwkim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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