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화 “지난 5년 간 유배생활...이젠 무대에서 웃기다 자빠지고 싶다"
김미화 “지난 5년 간 유배생활...이젠 무대에서 웃기다 자빠지고 싶다"
  • 공은비 기자
  • 승인 2013.01.22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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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웃기고 자빠졌네' 출간 개그우먼 김미화
▲ 개그우먼 김미화

[에브리뉴스=공은비 기자] 지난해 11월 개그우먼 김미화는 소소한 일상 등을 일기처럼 담담하게 기록한 에세이집을 발간했다. 한때 코미디 '순악질 여사'로 개그우먼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녀는 현재 팟캐스트 라디오 방송 나는 꼽사리다’, CBS ‘여러분이라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서 MC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에브리뉴스>는 지난 7일 CBS 방송국에서 김미화를 만나 20여년간 활동했던 코미디언의 자리를 떠난 이후 겪었던 이혼의 아픔과 재혼을 통해 다시 찾은 행복한 가정의 모습, 라디오 MC로 활동하며 겪었던 에피소드 등에 대한 그녀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는.

- 지난 5년간의 기록들입니다. 요즘 TV출연이 별로 없어 사람들이 궁금해 하더라구요. 김미화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제가 시골로 내려간 지 8년 됐어요. 시골에 사는 재미? 되게 재밌어요. 그리고 느리게 걷는 방법 같은 거. 사람들이 매번 차를 타고 다니는데 차를 타고 빨리 지나가면 코스모스는 그냥 점으로 보이잖아요. 휙 나가가고. 근데 걸어서 코스모스를 보면 그건 정말 예쁜 꽃이잖아요.

도시 생활을 포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갔어요. 불편한 점도 많지만 그만큼 행복한 일도 많고 사소한 부분에서 즐거움을 얻으면서 살고 있어요. 버스도 없어서 한번 나오려면 동네 반바퀴를 걸어 내려와야 하는 곳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공기와 별과 달. 이런 자연의 흐름을 보고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는 걸 보면서 산다는 거. 그런 소소한 얘기들을 담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재혼했잖아요. 재혼부부로서, 우리 부부의 삶은 이렇다. 그리고 여러 힘들었던 일들, 좋았던 일들. 5년 정도 기간의 일기를 모아서 만든 느낌이에요. 농촌에 살다보니 동네사람들과 만나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굉장하거든요. 너무 재미있어요. 그런 에피소드를 담고 싶었어요.

개그우먼 김미화 책 '웃기고 자빠졌네' 출간

책 제목이 웃기고 자빠졌네’인데, 중의적 표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여러 가지 면에 효과가 있더라고요. ‘웃기고 자빠졌네우선 내가 묘비명으로 쓰고 싶은 문구 이기도 해요. 코미디를 계속 하다 무대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 바람이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느끼신 것처럼 이중적인 느낌으로 쓰일 수 있겠다 싶어 해봤는데 다들 되게 재미있어 하더라고요. 어떤 경우는, 독자들이 자빠졌네부분만 기억을 해서 서점에서 지랄하고 자빠졌네를 달라고 했다고도 하고. 재미있잖아요? 유쾌하고...

어렸을 적부터 코미디언이 되겠다고 꿈을 꾸게 된 이유가 있나요.

- 그냥 이유가 없어요. 오로지 꿈이 코미디언. 그 소망대로 사는 사람이 정말 없는데. 부럽죠? 다른 꿈은 없었어요. 6살 때부터 난 코미디언이 되야 하겠다생각 했는데 그 바람이 쭉 이어졌어요. 학교에서 오락부장은 당연히 맡아 했고요. 선생님들도 반 친구들이 졸고 있으면 그때마다 저더러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어요. 잠 깨워주는 역할, 웃기는 역할 맡아 하고, 초등학교 때부터 쭉 의심 없이 웃기는 역할은 무조건 나야. 중학교 때 응원단장부터 시작해서 쭉 올라갔는데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 였어요. 운명적으로 난 웃겨야 하는 사람이구나.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지. 그런 재능들을 선생님들도 높이 평가해주셨고 친구들도 학교에서도 단연 스타였어요.

관객의 맛이라고 할까, 사람들이 나로인해 웃고 즐거워 하는 그 쾌감, 그걸 맛 본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치고 가수 흉내 내면 친구들이 우와~’ 하는 게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 희열을 계속 느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어떤 거창한 목적이 아니었고 그 자체가 행복했어요.

▲ 책 내용에 남편 윤승호씨 얘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실제 어떤 분인가요.

- 그 책에는 남편에 대한 표현이 10% 정도밖에 안 됐는데, 그걸 보고도 사람들이 눈꼴시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남편을 그렇게 자랑을 할 수 있느냐면서. 그런데 실제로 가감 없이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에요. 뒷모습도 고마운 사람. 사랑을 받는 것보다 줄 때 기쁨이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또 음악을 좋아해서 연주인이 되고싶어했어요. 교수를 그만두고 외국에서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으려고 줄리어드 음대를 비롯해서 2군데에 시험을 보고 입학 허가를 받았을 정도로 음악에 꿈이 있었어요. 예전에 교수생활 접으려고 했거든요. 그걸 못했던 게 지금 한이 된거죠. 그래서 그 허가서를 액자에 넣어두고 바라보고 있습니다.(웃음)

책에도 나와 있지만 남편은, 장애를 가진 아이를 굉장히 오랫동안 혼자 키웠어요. 예전부터 잘 알던 오빠동생 사이여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키워오는걸 봐왔거든요. 남자들이 보통 이혼을 하거나 사별하면 아이들을 온 힘을 다해 키우기 정말 어렵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 보면서 이 사람은 부성애가 정말 많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특별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마음을 다해서 따듯하게 아이를 대하고 돌보는걸 보면서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 한거죠.

둘다 재혼이라 각자의 아이들이 있잖아요. 가식 없이 동등하게 사랑해 주는 걸 느꼈어요.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저에게는, 그야말로 신던 신발 같은 편안함을 주는 사람. 우리 둘 다 많이 깨지고, 부서지고, 굉장히 고통스러운 삶을 삶아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누군가에게, 또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살고 싶다는 이기심이 오히려 서로를 더 배려하게 하는 부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싸운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옛날엔 내가 정말 바보처럼 살았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딸은 만약에 너무 결혼생활이 괴롭다거나 힘들다고 하면 빨리 헤어지라고 해야겠다는 생각도 해요.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많은데 한번 결혼했다고 그 책임감에 눌려 너무 감내하면서 참고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너무 극한적으로 안 좋을 때, 이게 정말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땐 부모가 오히려 믿어주고, 도움을 줘서 자식을 행복한 방향으로 이끌어줘야 할 것 같아요.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름이 진땡이라고 하던데.

- 우리 진땡이. 스물아홉이네요.

사람들이 느끼기엔 장애 있는 사람과 함께 가족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불쌍하다’, ‘장애아 어떻게 키우느냐’, ‘무슨 죄를 지어서 장애아를 낳았지하고들 생각하잖아요. 근데 장애아를 키우는 행복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순간들이 괴롭죠. 건강한 보통의 아이들은 나이가 되면 군대를 가는데, 우리 아이는 군대를 가고 싶어도 못가요. 군대에서 받아주지 않죠. 부모의 생각 같아서는 우리 아이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받아주나 하면서 서운하기도 하고요. 그 아이도 남들처럼, 여자친구가 없을 때 쓸쓸해하고, 멋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어 하고 하는 평범한 청년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가졌는데.. 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게 가슴 아프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주는 행복감. 다른 청년들이 줄 수 없는 그런 따뜻한 마음이 있어요. 누구보다 순수하고요. 그 아이를 보면서 저도 많이 낮아지고요.

각자의 아이를 키우려면 힘든 부분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 그냥 편안하게 해주자 생각했어요. 서로가 서로의 아이들에게 불만이 있으면 같이 얘기해요. 내 아이라고 감싸고 상대방이 인내해주길 바라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내가 낳은 아이들 못난 모습이 남편에게도 보이죠. 그럼 같이 흉보고 같이 칭찬해주고 그렇게 해요. 같이 풀어버리는 거죠. 친구지간처럼 얘기해요. ‘너 딸 왜이리 못났니?’하면 어디가 그렇지? 진짜 그런가?’하고 웃기도 하고 그냥 편하게 얘기해요. 객관적이 되는 거에요. 아이들에 대해서도, 서로의 모든 부분에서 그냥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니 오히려 편해지더라고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지 않고 만났으면 이렇게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고 그렇게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 그런 얘기를 항상 해요. 내가 남편을 칠 벗겨진 헌 가구에 표현하면서 새 페인트칠 해주면서 살아야 하냐고 장난스레 물으면, 남편은 우리가 새 가구로 만났다면 이렇게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편안해질 수 있었을까하고 얘기해요. 맞는 얘기 같습니다. 아픔을 겪은 사람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그만큼 다시 반복하기 싫은 거니까요.

우리 각자의 아이들이 있지만, 남편과 나의 아이를 낳으려고 하나 더 낳으려고 노력도 했어요. 내가 저 사람의 아이를 낳아준다면 얼마나 예뻐할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줄까, 싶은 생각에 아이를 갖고 싶었어요. 아이가 생기면 아마 바구니에 담아서 학교 연구실에 매일 데리고 가고 책 보면서도 아이 봐줄 사람이거든요 정말. 그런데 안되는 건 안되는 건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는데 어렵더라고요. 마음이 많이 아팠죠.

사전 조율 없이 방송국의 일방적 통보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차 했을 때의 심정은 어땠나요.

- 가능합니다. 매번 그래요. 프로그램이 1년에 몇 개가 새로 나오고 몇 개가 없어지는지 셀 수 없어요. 잘 나가는 프로그램이야 오래 가지만 보통 드라마 같은 경우엔 6개월 하고 끝나고 3개월 하고 끝나고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예요.

또는 시청률이 안 나오고 청취율이 안 나오면 새롭게 바꾸려고 할 때. 진행자를 교체하는 게 가장 간판을 바꾸는 거기 때문에 되게 쉽죠. 바꾸는 방법 중 제일 쉬운 게 진행자 교체예요. 진행하는 사람들 또는 프로그램을 끌고 가는 피디 입장에선 매일 보던 사람인데 어떻게 딱 자르는 게 쉽겠어요. 그러니까 결단내리고 모질어지는 거죠. 내가 피디라고 생각하면 그런 행동들이 이해가 가요. 근데 제 말은, 좀 예의를 갖추고 한 두달 전에라도 미리 얘길 해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는 거죠.

하지만 본인이 한달, 두달 후면 이 프로그램을 그만 둬야 한다고 미리 안다면 프로그램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미리 얘기해주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거고. 그런 부분들이 프로듀서로의 프로의식이라고 한다면 그건 이해가 가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어떤 이유든 서로가 마지막을 맞이할 때, 예를 들면 우정패라도 나누든지 그 섭섭함을 치유할 수 있는 예의정도는 갖추었으면 하는 바람이죠. 헤어질 때 아름답게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랄까. 헤어지고나서 언제든 또 다시 만날수도 있는 건데, 미워하면서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힘든거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을 영영 잃을 수도 있는 거고. 저는 그게 아쉬운 거에요. 좋은 사람은 다시 보고싶잖아요. 그런데 이런 일로 다시 못 보게 되면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게 힘든거죠.

▲ 김미화하면 코미디언 외에도 폴리테이너, 소셜테이너 같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데요.

-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면, 꼭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일부에서 어떤 사회적 단어로 규정지은 거죠.

폴리테이너는 잘못 된 표현이고요. ‘폴리테이너는 정치적인 연예인인데 전 정치적인 활동을 한번도 해본 적도 없고 정치적으로 누굴 지지해본 적도 없고, 누굴 도운 적이 없어요.

아무래도 제가 사회복지를 전공했고 어려운 사람들한테 관심이 많아 활동했을 뿐인데, 그런 부분들과 연결되고 또 일부 언론의 왜곡이 맞물려져서 진보, 좌파라는 성향으로 보인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소셜테이너라는 말이 들어오고 SNS가 발달하다 보니까 연예인들의 말이나, 활동이 화제가 되고 그게 또 언론에 보도되는 과정에서 왜곡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후진 동네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아날로그적이고 동네 사람들의 정이 얽힌 시골에 끌리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릴 때 판자촌을 전전하면서 살았거든요. 나라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밀가루도 받아먹고 라면도 받아먹었어요. 그래서 저는 국가에 대한 막연한 고마움이 있었어요. 국가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밀가루도 주고 기초 수급용품도 줘서 우리가 그걸로 끼니 때우면서 살았다 하는 감사한 마음 있잖아요.

실제로 아버지는 폐병에 걸렸었는데 보건소에서 약을 타먹지 못했으면 살 수가 없었어요. 그 부분도 국가에서 도움을 받은 거죠.

하지만 결국 고기한번 못 사먹고 제대로 챙겨먹지를 못해서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실 당시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셔서 돼지고기를 사다드렸는데, 그걸 드시다 체해서 돌아가셨어요. 마음이 너무 아팠죠.

그 당시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제가 9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 때 내 마음에 정해놓은 게 있어요.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고나면 반드시 어려운 사람 옆에서 돕겠다, 봉사하면서 살겠다, 그게 나의 기쁨이다.’ 저는 그 기쁨을 찾아서 한 것 뿐 이거든요. 근데 그걸 일부에서 어떤 사회적 단어로 수식해서 규정짓고, 그로인한 편견이 생기고. 아쉽고 또 힘든 부분이죠.

코미디언으로 얻은 인기로 불러주는 데는 다 갔어요.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다보니 대통령과의 대화 사회자에도 초대가 됐고요. 그 뿐인데, 자기들 편 가르기에 저를 이용한 것 같아 억울한 마음이 있죠.”

제가 코미디언이 된지 30년이 됐어요. 제가 쓰리랑 부부로 인기를 얻은 게 80년도 중반이에요. 그래서 그때부터 돕는 활동을 시작 했어요. 많은 곳에서 저를 부르셨고 그때마다 할 수 있는 한, 가서 도와드렸어요.

행사가 있으면 사회도 봐드리고, 거동이 불편한 분들 목욕 시켜드리거나 아이들 신발 빨아 주거나 그냥 소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거에요. 설 때 같이 만두 만들고 떡국 만들고 같이 연 날리고. 그런 걸 왜 못해. 전 저를 불러주는 게 고마운 거죠.

그 분들을 통해서 더 낮아지고 내가 욕심을 가진 게 있었다면 그 분들을 통해서 내가 그런 걸 깨달을 수 있게 돼서 너무 감사한 거예요. 내가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게 너무 감사하다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 이상한 방향으로 매도가 됐던 거죠. ‘저 사람 정치인이야? 정치인으로 가려는 거 아냐?’ 심지어는 제가 시사 프로그램을 하다 대통령과의 대화에 사회를 보게 됐는데 그게 사회적으로 자기들 편가르기에 써먹기 딱 좋은 어떤 소재가 돼버린 셈이죠. 내가 그 편가르기 도구에 희생돼서 매장 돼야 하나? 그런 억울함이 있었죠.

김미화는 폴리테이너야? 소셜테이너야?”

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들. 우리는 정체도 모르는 이상한 소셜테이너라는 말 듣고 있는데. 그게 도대체 정확히 뭔지 모르겠어요. 사회적인 연예인 이라는 건데. 이것이 곧 정치적인 연예인을 얘기하는 건지, 명확하지 않잖아요.

제가 생각했을 때, 정치적이라고 하면 정치에 줄을 대고 그 정치의 힘을 대서 활동하는 연예인이 정치적인 거예요. 예를 들어 누굴 지지선언해서 그 힘으로 해서 다시 방송활동을 하고 방송을 따낸다거나. 그런 게 있어야 정치적인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거든요.

제가 NGO(국제 비정부 기구)를 비롯한 수십군데 단체에서 홍보대사 활동을 했어요. NGO라는 단체는 그대로 수십년 동안 가는 건데 어떤 곳에서는 빨갱이 단체, 어떤 곳에서는 여당 단체, 필요에 따라 편 가르기를 해버리니까 어느 순간엔 나라로부터 지원 받는 좋은 단체고 어느 순간은 지원이 끊어지는 나쁜 단체가 되더라고요.

그런 개인의 성향에 의한 활동조차 편 가르기로 이용되는 부분이 굉장히 힘들어요. 그래서 소셜테이너라는 말 자체가 나쁜 말도 아닌데, 폴리테이너라는 말과 혼동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김미화는 폴리테이너야? 소셜테이너야?’하고 규정화 해서 생각하는 그 시각이 굉장히 불편한거죠. 일반 대중들도 혼동하시지만 기자분들조차 그렇습니다. 그래서 언론에 그런식으로 보도되는 거겠죠. 기사에 폴리테이너로 유명한 김미화는...’하고 나와 있으면 나중에 그 남아있는 자료로 꼭 어디선가 꼬리를 물고 공격하더라고요. 결국 저를 공격하는 상처에 이용되는 단어가 되더라고요.

폴리테이너, 소셜테이너로 활동하다 보면 많은 제약이 따를 것도 같은데요.

- 굉장히 부럽죠. 외국에서는 오히려 대통령 영부인이나 영화배우, 가수, 코미디언 할 것 없이 사회적으로 알려진 공인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지 않고 오로지 개인적으로만 활동하면, 그걸 이상하게 보죠.

네가 사람들로부터 그만큼 사랑을 받았는데 돌려주지 않고, 나누지 않느냐며 오히려 비난해요. 근데 우리 사회에서는 넌 코미디언이니까 그냥 코미디만 해. 네가 왜 사회 참여를 해? 왜 네가 어려운 사람들 얘길 해?’ 하고 말하니까 그게 씁쓸하죠.

그런 활동을 그냥 접고 아무 것도 안 하면 오히려 편하긴 할 거에요. 구설수도 없고 아무 말도 안 나올테니까요. 방송에서 웃기기나 하고 깔깔거리기나 하고. 사람들이 말하는 코미디언역할 딱 그것만 하는 거겠죠. 그렇게 하면 그야 말로 예능 프로그램에서 돈 많이 벌고, 누리고 싶은 거 누릴 수 있을 거에요. , 할 수 있어요. 근데 그게 인생에 전부일까요? 아니죠. 그냥 저는, 제가 가진 신념대로, 어릴 때부터 바래왔던 대로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할 거라고 생각 했던 걸 실천하면서 살고 싶어요. 언젠가는 제 맘을 알아주겠지 하는 거죠. ‘언젠가는 알아주겠지하는 기대가 길어지니까 지치기는 하지만요.(웃음)

그래도 알아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힘이 납니다. 우리 아이들도 알아주고요. 그리고 제 남편이 알아주고요. 그래서 버티고 있는 거겠죠.

▲ 라디오 MC를 시작하면서 시사프로그램을 여러 번 진행하셨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 절대 쉽지 않죠. 프로그램을 맡기로 한 다음부터 시사에 관심을 갖게 됐고 논조별로 신문에 실린 사설들도 모두 비교평가 하면서 읽었어요.

손석희씨 프로그램도 꼼꼼히 체크했어요. 손석희 선배처럼 하고 싶은데 그게 굉장히 어렵잖아요. 그래서 손석희 선배가 밥 먹으러 가는 식당까지 쫓아다녔다니까요. 그 밥 먹으면 나도 좀 잘할 수 있을까 해서(웃음). 이런걸 손빠라고 하죠.(웃음)

손석희씨는 냉정하게 끊을 땐 끊으면서 진행하시잖아요. 근데 저는 그게 안 되고 질질 끌려가는 스타일이에요. 이 분이 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하는데 내가 중간에 끊으면 예의 없는 거 거 아닌가 해서 얘기 다 들어주고. PD가 앞에서 끊으라고 손짓으로 표시해도 그걸 못 끊고 예예~’ 하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그래도 굉장히 많이 노력해 빨리 적응해갔어요. 저녁 6시에 생방송이면 2시에 가서 신문 다 읽고 체크하고, 작가들 자리에 앉아서 인터넷 보면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지?, 인수위 명단이 발표됐네, 이걸 이 언론에선 이렇게 평가했네? 다른 신문은 어떻게 평가를 했지?’ 하면서 다 뒤져보고요. 같은 사안을 오늘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어떻게 다뤘는지 체크하고. 정말 종일 공부했어요.

그런 시간들이 처음엔 힘들었는데 매일 열심히 보고, 공부하다 보니까 이젠 좀 눈에 보여요. 근데 그게 10년 걸렸어요.(웃음)

나는 꼽사리다(팟캐스트 시사경제방송)’ 들을 때 김미화씨 역할이 좋았던 이유는, 다른 경제학 박사들이 하는 얘기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청취자들이 당연히 알거라고 생각하고 넘기는 부분을 일반 대중의 목소리로 질문해주는 부분이었습니다.

- 제가 진짜 진행에 타고난 거라니까요. (웃음) 제가 그런 재능은 있는 것 같아요. 일단 저 스스로 모르는 사실을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나 무식해. 그러니까 너희들이 알려줘야지하고 선띨이(선대인), 우띨이(우석훈)들 같은 경제학 박사들에게 말해요. ‘너희들이 그렇게 많이 아는데 국민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쉽게 설명하지 않으면 그건 학자로서 의무를 다 한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나도 당당하게 대중의 입장에서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거 같아요.

그건 기자들도 마찬가지겠죠. 쉽게 설명하고,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게 얘기해줘야 하죠. 방송을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으면 물어봐요. 어제 방송을 들은 사람이 오늘 항상 듣는게 아니거든요. 며칠 걸려 들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다시 설명해줘야죠. 정말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매번.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제가 코미디언의 위치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하니까 시사, 경제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이점이에요. 경제학자인데 계속 몰라서 꼬치꼬치 질문해. 그러면 그것도 좀 부자연스럽거든요. 저는 정말 모르고, 일반 대중의 눈을 가지고 있고. 그게 청취자들에게 편안하고 만만해 보여서, 시사프로그램임에도 오히려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송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자님도 그런 부분이 장점이라고 말씀하시는 거고. 저 정말 진행 타고난 것 같다니까요(웃음).

시사프로그램 하시면서 보람을 느꼈던 부분이 있다면.

- 어려운 분들, 가려진 힘든 분들 목소리를 프로그램에 담을 때 좋아요. 많은 예들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 생각나는 게 있네요.

수능이 끝나고 라디오 진행자들 멘트를 채널마다 돌려가며 들어보면, 오프닝 멘트가 천편일률적으로 수능 보신 분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잖아요. 근데 그럴 때 저는 한번 비틀어서 우리 사회는 수능을 보는 사람들만 있나, 수능을 못 본 사람들의 입장 있다고 얘기해요. 수능 보신 분들 축하하지만 정말 여러분들이 힘든 수능 시험을 볼 때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런 분들 용기 내달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고. 그런 부분을 끄집어 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 굉장히 보람 있고 매력 있죠.

PD가 처음에 사회복지를 크게 하는 거라면서 저를 불러왔다고 했는데 그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 프로그램 하는 동안 좋았어요. 또 좋은 일 한 분들을 마음껏 칭찬해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예를들면, “여성을 구한 경찰 최병직씨! 최병직씨! 최병직씨! 제가 3번 불러 드렸습니다하면서 이름 많이 불러드리고, 별거 아닌데도 좋아하시거든요. 불러드리는 저도 즐겁고요. 그러면서 사람들과 교감하는 거죠. 그런 게 재밌었어요.

정치권 물갈이 얘기가 한참 나올 때...‘어항 물갈이 전문가전화연결

시사프로그램에 약간의 재미를 준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었고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계속 정치권의 물갈이 얘길 하는데 정말 물갈이가 뭐냐. 국회의원이 바로 되어야 하고 물이 흐리고. 매일 그런 식으로 표현이 되잖아요. 그 사안에서 우리는 어항 물 갈이 전문가를 연결 했었어요. 도대체 물고기는 물을 다 갈아야 하냐. 아니면 반은 남겨두고 반만 놔야 하냐. 몇 개월에 한 번씩 물을 갈아야 하냐. 그게 되게 재밌었었죠.

KBS친정같은 곳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제일 많이 상처를 받으셨을 것 같은데, 지금 마음이 어떤지.

- 지금은 괜찮아요. 또 기회가 되면 갈 거고요. 전 가진 게 웃기는 거니까.

기회가 된다면 다른 곳보다 KBS와 가장 먼저 화해하고 싶어요. 가장 많이 상처받은 곳 이지만 그만큼 애정이 깊어서 더 힘들었던 거니까요. KBS에서 손을 내밀어주면 감사하게 손을 잡을 준비가 돼 있어요. 그게 우리 사이(KBS와 김미화씨)를 푸는 순서라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방송인이고 마이크 앞에서 또는 카메라 앞에서 활동을 해야만 저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활동을 하는것에 대한 노력은 게을리 하지 않을 겁니다.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활동하고 싶어요.

블랙리스트’라는 말만 듣다가 책을 통해서 접해보니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 국무총리실에서 사찰 문건이 나온 게 2009년이죠. 이명박 정권 들어선 초기였어요. 제가 국무총무실에서 사찰을 당했고, 알고 보니 사찰 명단에 이름이 있었던 거죠.

초기에 제가 그렇게 정권으로부터 평가가 됐다면 방송사에선 그게 충분히 공유가 되면서 이 사람은 위험한 인물이라고 평가됐을 수 있겠죠. 저는 그걸로 방송을 못하게 됐던 것일 테고.

대통령 중에서도 유일하게 제가 많은 대통령과 만나는 장소에서 사회를 봤을 거에요. 제가 83년부터 코미디언을 했으니까 오랜 세월이잖아요. 그 세월을 생각 해보면, 제가 어떤 대통령을 안 만났겠어요. 다 만났지. 그런 면에서는 일절 얘기가 없다가 갑자기 노무현이라는 대통령과의 행사에서 사회를 보면서 좌파 대열에 껴들어갔단 말이에요. 너무 이상하잖아요. 저는 그런 현상이 웃긴다는 거에요.

그리고 분명한 점 한 가지. 저는 이명박 정권 어디에서도 정치적으로 누굴 지지하고 지지하지 않고 그런 의사를 밝힌 적이 없어요. 이젠 지겨워요 그런 부분은. 너무 고통을 많이 당해서.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근거 없이 그렇게 평가 당하는 게 싫은 거예요. 다시 얘기해도 힘든 부분이네요.

코미디언으로서의 삶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셨는데 요새는 개그 무대에서 김미화씨를 보는게 쉽지 않습니다.

- 안 써주신 거죠. 언제든 나와서 웃겨달라고 코미디언 김미화로 부른다면 달려 나갑니다. 어디든.

책속 소제목 중에 저를 잃지 마십시오라는 부분이 의미하는 것은.

- 제가 쓰리랑 부부에 출연할 때 비공식적으로 시청률이 80% 였어요. 아파트 하나가 폭발하듯이 웃음소리가 같이 울렸어요. 그렇게 사랑받았던 코미디언이 아무 이유도 없이 매도를 당한거에요. 방송에서 30년 이상을 꾸준히 사랑받도록 국민이 키워주셨어요. 코미디언 하나를. 그만큼 성장시켜주기 어려운 거거든요. 저역시 그 부분에 감사해서 제가 가진 재능, 받은 사랑 좋은 일들에 쓰려고 했던 거고요.

온 국민이 키워주신 코미디언을 그렇게 정치적인 논리로, 한마디로 사장시켜버리는 거. 잘 키워놓은 웃기는 코미디언 하나 잃어버리는 거잖아요.

난 블랙 리스트가 있느냐, 없느냐. 본 적도 없으면서 편향되게 그렇게 생각해서야 되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거고, 그렇게 공감해주길 바란 건데 윗분들이 거기에 대해 신경질을 내버린 거거든요. 그래서 억울한 면이 있죠.

블랙리스트가 없대요. 없다면서 갑자기 왜 저를 안써요. 이상하잖아요. ‘없다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저를 이전처럼 방송에 써야 하는 게 맞는 것 같거든요.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고소를 취하한다고 KBS에서 얘길 했는데 여태까지도 안 써주고 있는 거에요.

내 경험과 내 재능은 회사에서 일하면서 키워진 게 아니고 온 국민이 원해서 키워진 선택받은 코미디언 이라는 거 에요. 이걸 그냥 버려버리면 너무 아깝다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너무 아깝잖아요. 나 같은 코미디언이 농사짓고 살게 한다는 거. 농사 아닌 어떤 일이건 간에, 저같이 웃기는 재주 있는 사람을 방송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무대에서 국민들 대중들을 웃기게 하는 일을 못하게 하면 너무 아까운 일 아닌가요. 그렇잖아요.

저는 사실 내 행복만 따지면 난 남편하고 소소하게 농사짓고 사는 게 너무 행복해요. 아이들도 잘 자라주고. 더 이상 바랄 게 뭐가 있겠어요. 내 꿈을 다 이뤘고 코미디언으로서 30년동안 사랑 받고 살았으면 됐지.

혹자는 니까짓 게 뭔데, 코미디언 하나 사장되는 거 뭐 큰일이야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내 경험과 내 재능은 회사에서 일하면서 키워진 게 아니고 온 국민이 원해서 키워진 선택받은 코미디언 이라는 거 에요. 이걸 그냥 버려버리면 너무 아깝다. 그래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거 에요. “저를 잃지 마십시오아주 절절한 마음이었죠.

지난 5년간 이명박 정부 안에서 김미화씨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 유배지. 5년 동안 유배지나 다름 없었어요. 사장된 거예요. 섬으로만 쫓겨나야만 유배인가요. 방송에선 유배당해서 산거죠. 유배지가 뭐 특별한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5년 동안 유배생활 같았어요.

▲ 지난 5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 앞서 말한 바람들 외에는, 저는 정말 매일 행복해요. 요새는 너무 행복해서 일기가 안 써질 정도에요. 예전에 괴롭고 힘들었던 때는 일기를 쓰거든요. 쓰면서 반성도 하고, 앞으로 이렇게 살지 않을 거야 하고 생각도 하고. 그런 반성과 다짐과 괴로움이 섞여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행복하니까 일기장을 펴면 쓸 말이 없는거에요. 남편하고 밥 맛있게 먹고 마을에 나가서 산책하고. 뭐 너무 행복한데 쓸 말이 딱히 없더라고요. 그래서 글 쓰는 사람들이 괴로워야 글이 나온다고 하나봐.(웃음)

요즘의 행복은 이렇게 시골 내려와 사는 농촌생활에서 나오는 기쁨들이 많은 것 같아요. 동네 사람들이 심심하면 오골계 잡고 유정란 낳은 거 먹고, 돼지도 잡아서 동네 하우스에 모여서 먹고. 왕소금만 뿌려 먹는데도 예술로 맛있어요. 그러니까 술을 안 먹어도 낮부터 기분 좋게 취해있어요.

때마다 나오는 벌레들이 동일하게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어떨 땐 풍뎅이가 나와. 어떨 땐 반딧불이가 번창해. 어떨 땐 이름도 모르는데 저그(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움직이는 벌레가 있어요. 어떨 땐 하루살이가 번창해요. 그래서 때마다 온도에 맞춰 곤충들과도 다 친해져야 해요. 처음에는 적응이 어려울 수 있는데, 그게 시간이 지나고 자연스러워지다보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 행복감은 직접 겪고 직접 함께 숨 쉬고 느껴봐야 아는 것 같아요.

다시 떠올려 봐도, 매일이 정말 행복하네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 없어요.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거고요, 무대에서 불러주면 가는 거고요. 저는 계획없이 사는 사람이에요. 하루하루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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