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선거사-24) 제10대 대통령선거
(대한민국선거사-24) 제10대 대통령선거
  • s.doctor 김
  • 승인 2013.02.2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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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대통령 선거

[에브리뉴스]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이 치러지고 이어 11월 11일 대통령 권한대행인 최규하 국무총리는 시국 담화를 발표한다.

그는 담화에서 ‘유신헌법상 대통령 선출 시한인 1980년 1월 25일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0대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잔여 임기인 5년을 채우지 않고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개헌하여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최규하 권한대행의 정치일정에 따른 담화에 따라 모든 국무위원들이 정치적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최규하를 10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로 결론 내린다. 그러나 공화당의 강경파들은 담화 이틀 후 박정희 대통령 사후인 11월 12일에 공화당 총재에 오른 김종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로 결론 맺는다.

이 소식을 접한 신현확 부총리, 구자춘 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는 즉각 공화당 인사들과 접촉 자신들의 과도체제를 급히 정리하겠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양해를 구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의 요구에 따라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가결된 대통령 후보직을 김종필 총재가 포기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양측 모두 모양새를 갖춘다.

이어 11월 17일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가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틀 마련에 상호협력하기로 하면서 최규하 국무총리는 단일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거를 치른다.

1979년 12월 6일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된 제10대 대통령선거에서 최규하 후보는 재적의원 2,560명 중 2,549명이 출석한 가운데 2,465표(기권 11표, 무효 84표)를 얻어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12월 27일 취임한다.

취임 후 최규하 대통령은 각계 원로 · 중진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하고 전직 대통령인 윤보선이 의장으로 피선된다. 이어 김대중 등 재야인사 687명을 복권하는 등 나름의 의지를 보인다.

 신군부의 등장

 12.12사태의 진실

 10.26사건 이후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이 수사를 진행하는 중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전두환은 수사를 진행하던 중인 11월 6일 10. 26사건은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한 바 있었다. 더불어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하여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고 말하며 김재규의 말대로 중앙정보부로 가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했었다.

그랬던 전두환이 12월 12일 갑자기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납치·연행하여 일명 12.12사태를 유발한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김재규의 추천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오던 전두환을 동해안 경비 사령관으로 전출시키고자 했고 그에 정승화를 납치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정설로 믿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을 지냈던 허화평의 증언에 따르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동경사 전출에 대해 정승화 총장이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건의했지만 노 장관이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일하게 하라했다고 했고 전두환 사령관도 12.12 이후에 그 이야기를 노 장관에게 전해 들었다고 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발생한 최규하 대통령의 정승화 총장 연행을 위한 재가 역시 양방의 의견이 다르다. 한쪽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재가를 받기 위해 방문했다고 하고 허화평은 재가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보고 차원의 방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경복궁 30단에 모여 있던 장군들은 군에 어두운 최 대통령의 이해와 설득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이 진실일까? 그를 살피기 위해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사건 당일인 12월 12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 30경비단 장세동 단장실에 모여 있던 면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날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하나회와 관련 있는 인사들로 차규헌, 황영시는 하나회의 후원자로 그리고 노태우 이하 나머지는 모두 하나회 회원이었다. 하나회 회원이었던 그들만의 모임이 군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을 이해시키기 위함이라는 주장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여하튼 그 시간 공교롭게도 정승화 쪽 사람들로 분류되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헌병감 김진기 등이 전두환 측의 유도로 연희동의 한 음식점에 모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허화평의 진술은 신빙성이 약하다. 아울러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갔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후일 당시 그 시간 최규하 대통령을 만났던 신현확 전 총리의 증언에 따르면 최규하 대통령이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함께 오라며 물리친 일에 대해 잘한 처사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또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보직해임과 관련해서 정승화 총장이 노재현 장관에게 건의한 내용이 있다. 정승화는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인 12월 9일 전두환의 월권을 이유로 보직 해임을 건의한다. 그의 건의에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 좀 더 지켜보자’고 만류한다.

그런데 그 이후 노재현 장관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여기서 중요한 추론이 가능하다. 노재현과 정승화의 대화 내용을 노재현의 입을 통해 전두환이 사전에 알았다면 노재현이 사양길에 접어 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본다면 12.12 사태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였음이 드러난다.

 5.18 및 국보위 등장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대한민국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국대학에 대해 휴교령을 내린다. 또한 김대중 · 김종필 등 유력 정치인과 재야인사 26명이 계엄사령부로 무더기 연행되고 김영삼은 가택 연금된다.

이 대목에서 살펴보아야 할 사건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불러오게 된 부마사건이다. 부마사건 역시 여러 사유가 있지만 그 중심에 김영삼이란 인물이 있었다.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에 따라 그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을 기점으로 시위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정권은 비록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진압했지만 과격하게 대처하지 않았고 이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김재규의 온화한 대처가 문제로 부각될 정도였다.

이와 관련 광주에서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비상계엄으로 전국의 각 대학이 계엄군에 의해 장악되면서 그야말로 세상이 쥐 죽은 듯 변하는데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의 전남대학교 학생과 비상계엄군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기회로 김재규 식이 아닌 차지철 식의 진압이,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로 뒤를 이어 광주에서의 사건과 관련하여 김대중은 내란혐의로 기소되기에 이른다.

순수한 학생들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운동이 군과 충돌하면서 변질되기 시작한다. 시위대들이 무기고를 털고 무장을 하면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자 진압군 역시 단순 진압이 아닌 군사작전을 감행한다.

결국 군에 의해서 사건이 평정되지만 누가 먼저 발포했느냐의 부분 등 심각한 의문점을 남긴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수많은 순수한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마는데 사건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기 바쁘게 신군부는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으로 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국보위)를 설치한다.

국보위는 대통령이 비상 업무를 지휘·감독하고 내각과 계엄군 당국 간의 협조체계를 강화하여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대통령 최규하를 의장으로 주요 행정 각료 10명과 군 장성 14명 등 24명으로 구성하고, 위원회가 위임한 사항을 심의·조정하기 위한 상임위원회를 두었다. 상임위원회는 13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고 국정 전반에 걸쳐 통제기능을 하는 등 제반 업무를 분담하였다.

이들은 안보태세 강화, 경제 난국 타개, 정치발전, 사회악 일소를 통한 국가기강 확립 등의 기본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명분으로 유신체제 하의 핵심세력을 포함한 공직자 숙정, 중화학공업투자 재조정, 졸업정원제와 과외금지, 출판 및 인쇄물 제한, 삼청교육 실시 등 지배구조 재편을 위한 제반조치를 신속하게 실행에 옮긴다.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최규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사후 대국민 담화를 통해 새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잔여임기인 5년을 채우지 않고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개헌을 하여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와 관련 대통령에 당선 된 이후인 1980년 6월 12일 다시 담화를 통해 81년 상반기 중에 반드시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러던 그가 두 달 후인 8월 16일 전격적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왜 최규하 대통령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면서까지 대통령직의 사임을 서둘렀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것도 다른 것이 아니고 권력인데 말이다. 이와 관련 후일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의 법정 진술을 토대로 그 실상을 살펴보자.

전두환, 노태우로 대변되는 신군부는 애초에는 권력에 그리 집착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던 그들이 12. 12 사태를 거치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진행되자 그야말로 혼돈에 휩싸인 현장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그저 막연히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목표만 세웠지 대통령인 최규하를 언제 밀어내야 할지는 결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그들이 5.17을 시발로 광주에서 5.18 사건이 터지면서 최규하 대통령을 조속한 시일에 사임시키기로 마음을 굳힌다.

5.18 사건을 처리하면서 후일 어찌 전개될지 모를 불안감에 최규하 대통령 조기 사임 작업에 착수한다. 이를 위해 신군부는 최 대통령 측근들에게 은근하게 압력을 가하고 원로들을 동원하여 설득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한다.

이와 관련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자신의 경북고 선배이기도 한, 국무총리직을 사임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신현확을 찾아가 최규하 대통령이 일찍 사임할 수 있도록 매개자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신현확 전 총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에 신군부는 그들과 평소 가까이 지내던 군 출신 원로이며 최규하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였던 김정렬에게 시선을 돌린다. 후일 국무총리에 오르는 김정렬은 그들의 요구를 선선히 받아들이고 최규하 대통령을 만난다.

최규하 대통령을 만난 김정렬은 신군부가 최 대통령이 일찌감치 사임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한다. 그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은 반색하고 나선다. 군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오히려 반문하기에 이르고 첫 만남은 그렇게 실패로 끝을 맺는다.

김정렬의 하야 권유가 실패하자 신군부는 다시 부탁하게 되고 그를 받아들인 김정렬은 7월30일 오후 여섯 시 청와대를 방문하여 다섯 시간에 이르는 담판을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최규하의 승낙을 이끌어 낸다.

그 날 신군부가 김정렬을 통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낸 메시지는 ‘명예롭게 퇴진한 후 편안한 여생과 불명예스럽게 퇴진해서 불행한 여생 사이의 선택’ 이었다고 전해진다.

여하튼 다음날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을 청와대로 불러 조기 하야 결심을 밝히며 자신의 자리를 대신 맡아달라는 요식 행위를 거친다. 이후 곧바로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로 떠나 머리를 식히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당시 대변인인 서기원을 불러 8월 14일을 기해 사임할 테니 성명서를 작성하라 이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8월 14일은 당시 구속 중이던 김대중의 1차 공판일이라 이틀 뒤로 연기,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S. doctor 김  |  webmaster@ever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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