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선거사-30) 제13대 국회의원선거
(대한민국선거사-30) 제13대 국회의원선거
  • S.doctor 김
  • 승인 2013.04.1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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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선거사-30) 제13대 국회의원선거

 1988년 4월 26일 실시되며 의원 정수는 12대 때보다 23석이 늘어난 299석(지역구 224, 전국구 75)이었다. 선거 방식은 12대 때의 중선거구제와는 달리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거구별로 최다수 득표자 1인을 당선인으로 하는 1구 1인의 소선거구제(지역구)와 의석 비율에 따라 배분하는 전국구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그러나 전국구의 경우 5석 이상의 의석을 얻은 정당을 자격 요건으로 하되, 제 1당의 경우에는 2분의 1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선거 결과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125석(지역구 87, 전국구 38)을 차지해 제 1당이 되었으나 과반수 의석 확보에는 실패하였다. 그 밖에 평화민주당이 70석(지역구 54, 전국구 16), 통일민주당이 59석(지역구 46, 전국구 13), 신민주공화당이 35석(지역구 27, 전국구 8)으로 뒤를 이었고 무소속이 9석, 한겨레민주당이 1석을 차지하였다.

 지역감정의 고착화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소선거구제로 변경됨에 따라 대선 시에 불거지기 시작했던 지역주의가 고착화되고 이후 여타의 모든 선거를 결정짓는 바로미터가 되기 시작한다. 그를 살피기 위해 4당의 터전에서의 선거 결과를 살펴보자.

부산에서 15석 중 14석을 통일민주당이 당선되는 것을 필두로 대구에서는 8석 전석을 민정당이, 광주에서는 5석 모두를 평민당이, 대전은 4석 모두를 신민주공화당이 석권한다.

이어 충남은 14석 중 9석을 신민주공화당이, 전북은 14석 모두를 평민당이, 전남은 19석 중 18석을 평민당이, 경북은 21석 중 17석을 민정당이 확보한다. 다만 경남의 경우 집권당인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이 고루 의석을 확보한다.

후에 일이지만 심지어 김대중의 경우 호남지역에 자신이 애용하던 지팡이를 꽂아도 당선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겨나고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 영남 출신으로 이수성 전 총리의 친동생인 이수인 박사의 경우가 그러했다.

전남 영광 · 함평에서 당선되었던 서경원 의원이 비밀리에 입북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온 부분으로 인해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보궐선거가 실시되는데 김대중은 지역감정 해소라는 미명하에 당시 영남대 교수로 재직 중인 이수인을 공천한다.

호남과 전혀 연고가 없던 그의 공천과 당선은 각자의 텃밭에서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하게 되었고 이는 전국구 공천 및 지역구 공천과 관련한 정치자금 문제를 발생시키기에 이른다. 즉 당시 음성적으로 공식화되어 있던 전국구 공천 헌금과는 달리 지역구 출마자에게도 고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보도되고는 했었다.

여하튼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는 계속되는 국민의 민주화와 군사정권 청산 요구 등으로 인해 권익현 전 민정당 대표, 권정달 초대 사무총장, 전두환 동서 김상구, 정석모 전 사무총장, 윤길중 전 국회부의장 등 현역 의원 27명을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신진 인사들을 영입하여 쇄신을 기한다.

국민의 반감을 의식한 공천에도 불구하고 5공 청산에 대한 국민의 높은 열망이 민정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호남 지역 전멸을 비롯해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신민주공화당은 캐스팅보드의 역할을 하게 되는 절묘한 선거결과를 낳았다.

아울러 대선에서 2, 3위의 위치가 총선에서는 순위가 바뀌게 된다. 통일민주당은 13대 총선에서 득표율 2위(통일민주당 23.8%, 평화민주당 19.3%)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59석(평민당 70석)에 그쳐 제 3당의 위치에 머문다.

 3당 합당

 여소야대 정국에 당면한 민정당의 노태우 대통령은 정국주도권을 야 3당에 빼앗긴다. 실례로 13대 국회가 개원하자 그전까지 집권당이 독식하던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야당도 의석수에 비례해서 분배받는다.

이어 1988년 7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가 제출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기승 대법관의 대법원장 임명에 대해 당시 소장 판사들이 과거 권위주의 식의 전형적인 코드 인사라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대법원장의 임명동의안이 부결 된 일은 처음이었다.

또한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되면서 제9대 국회부터 제12대 국회까지 국정감사 없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16년 만인 1988년 국정감사가 다시 등장하기에 이른다.

비록 같은 성향의 신민주공화당이 있어 사안별로 협조를 구할 수 있었지만 노태우로서는 여소야대의 혼란한 정국의 탈피를 시도한다. 그를 해결하기 위해 타당과의 연합을 넘어 합당을 구상하게 되는데 노태우는 가장 먼저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에 호감을 가진다.

김대중과 손을 잡으면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다는 외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장기적인 포석에서 바라볼 때 호남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우군으로 만듦으로써 호남 지역의 민심을 얻는다는 일석이조의 구상을 하였다.

이어 노태우 대통령은 박철언 당시 보좌관을 김원기 평민당 원내총무와 접촉시켜 두 당의 합당을 개진토록 한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이질적인 두 집단 간의 합당설은 그저 설에서 끝나고 만다.

평민당과의 합당에 어려움을 느낀 노태우 대통령은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에 시선을 돌린다. 신민주공화당의 경우는 민정당과 성향이 엇비슷한 입장에 있었지만 통일민주당의 경우는 전혀 별개의 집단이었다.

그러나 후일 김영삼은 이에 대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정권획득에 대한 가능성이 가장 의미가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당시의 고착화된 지역 구도로 대선이 진행된다면 부산과 경남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었던 대통령 자리가 요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또한 김대중에 대한 불신이 한몫했을 수도 있었다. 김영삼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미 대권으로 가는 길에 두 번 씩이나 김대중에 의해 발목이 잡혔었다.

그리고 바로 삼당합당 전에 실시된 동해 보궐선거에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서석재 의원이 당시 신민주공화당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구속되어 있었던 점도 어느 정도 작용한 듯 보인다.

신민주공화당의 경우는 김종필 총재 자체가 더 이상 대권에 도전하는 게 힘들다고 판단하여 내각제 개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민정당, 통일민주당과의 합당에 나서게 된다. 아울러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간에 내각제를 매개로 전격적으로 3당은 합당한다.

 김상현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

 현대 정치사에서 김대중과 김상현의 관계는 바늘과 실이 아닌 한 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그들의 연은 이른바 군주와 가신의 관계가 아닌 동지의 입장이었기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김상현이 김대중을 만난 시기는 195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웅변대회장에서 당시 동양 웅변 전문학원 원장인 김대중을 만나 이후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한다. 김대중은 5대 보궐선거에서 강원도 인제에서 그리고 김상현은 6대 보궐선거 시 서대문에서 정치에 입문하며 동고동락의 길을 걷는다.

그 과정에서 김상현은 김대중으로 인해 숱한 역경을 겪는다. 그와 관련 김상현 당사자의 술회를 살펴본다.

‘10월 유신 직후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갔을 때나, 79년 YWCA 사건으로 다시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서나, 80년에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남산 지하실에서 54일 조사를 받을 때나 나 개인에 관한 일로 뺨 한 대 맞은 적이 없습니다. 전부가 김대중 씨의 여자관계, 정치 자금원, 군부 인맥, 행정부 내의 접촉 인사를 대라고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왼쪽 눈을 수술했습니다. 왼쪽 다리는 여름에도 얼음 속에 넣은 것같이 마비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던 둘의 관계가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1985년 10월 29일 국회부의장 파동으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신민당과 민정당은 야당 몫의 부의장으로 이용희를 밀기로 협의했으나 투표 결과 조연하가 부의장으로 당선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김상현은 비록 원외에 머물렀지만 자신과 민추협을 함께했던 조연하를 지지하면서 그의 당선을 도왔고 그 일로 김대중의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이른바 힘의 논리의 문제였다.

그 일로 서로 간에 경계심이 일기 시작하던 중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후보 단일화를 거부하고 통일민주당을 떠나면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김상현은 명분에 따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 입당한다.

입당 후 민주당 부총재에 임명되고 총재 직무대리로 대선을 지휘하면서 김대중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신뢰의 문제를 제기하는 등 김대중 공격에 선봉에 선다. 야당 후보 단일화를 파기한 김대중의 처사는 온당치 못하다는 논리였다.

그런 그가 13대 총선에 앞서 고민에 빠져든다. 그의 지역구인 서대문구를 고수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서대문구의 경우 호남 사람이 근 30%나 살고 있었고 절대적으로 김대중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터였다.

그 때문에 통일민주당 총재인 김영삼은 김상현에게 강남이나 전국구 중에 하나를 택일하라 권고한다. 그러나 김상현은 오랜 기간 연고를 지니고 있던 그곳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통일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한다.

그러자 김대중은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제적되었었던 김학민 학민사 대표를 공천했다. 이 처사는 결국 야당 표를 분산시켜 김상현은 서대문갑 구에서 민정당의 강성모에게 석패하고 만다.

이와 관련하여 후일 김학민은 14대 총선 당시 민주당으로 출마한 김상현의 선거사무장을 맡으면서 13대 총선 시 자신이 출마했었던 사유를 설명한다.

‘단순히 김상현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

또한 김학민은 2004년 2월 열린우리당 용인시 국회의원 예비후보자로서 인터넷 언론인 ‘서프라이즈’와 인터뷰하며 상기 내용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다.

‘13대 총선 시 평민당(김대중)에서는 김상현을 완전히 배신자로 본 것입니다. 배신자를 응징하는데 저를 도구로 쓴 것이죠. 그러나 워낙 준비도 부족하고 시일도 짧고, 당시만 해도 돈 선거가 판을 치던 때였는데, 저는 돈도 한 푼 없이 나갔지요. 어영부영 선거운동이라고 하다가 쓰디 쓴 잔을 마셨습니다.’

‘그때 동교동에서는 저에게 공천을 주면서, 당신이 나가서 김상현 씨를 무찌르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4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3당 합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상현 씨가 합당된 민자당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진영으로 다시 돌아왔죠. 그때 동교동에서는 나에게 김상현 씨에게 지구당을 양보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S. doctor 김  |  webmaster@ever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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