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선거사-32)제14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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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doctor 김
  • 승인 2013.06.1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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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선거사-32)제14대 대통령 선거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로 13대 때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직접선거 방식을 채택하였다.

후보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과 민주당의 김대중,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신정당의 박찬종, 정의당의 이병호, 무소속의 백기완과 김옥선의 일곱 명이 참여한다.

선거 결과 김영삼 후보가 997만 7,332표(득표율 42%)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뒤를 이어 김대중 804만 1,284표(득표율 33.8%), 정주영 388만 67표(득표율 16%), 박찬종 151만 6,047표(득표율 6%), 백기완 23만 8,648표, 김옥선 8만 6,292표 그리고 이병호가 3만 5,793표를 기록한다.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및 분열

 1992년 들어서자 민자당 김영삼 최고위원은 대권에 시동을 걸고 3월 28일 공식으로 대권도전을 선언한다. 다소 이른 감이 있지만 이는 상당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5공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노태우 정부와의 차별화, 아울러 조기 대선경선 구도를 조성해 자력으로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김영삼 최고위원이 대권 도전을 선언하고 당 수뇌부에서 사전에 후보를 조정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자 민정계 중진들은 사전 조정을 거부하며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결국 경선을 실시하기로 했고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은 완전 자유경선 실시를 천명한다. 아울러 공정한 경선 실시를 위해 공정성의 대명사인 이춘구 의원을 사무총장에 임명한다.

이어 민정계의 중진들인 박태준 · 이종찬 · 박철언 · 이한동 등은 함께 ‘반 YS’ 진영에 서서 민정계 단일후보를 내는 작업을 전개한다. 이 결과 박태준과 이종찬으로 압축되고 이어 민정계 중진 7인 모임에서 이종찬 의원을 반 김 단일 후보로 확정한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영삼 최고위원과 이종찬 의원 간에 경선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 4월 28일 국회 의원회관 대강당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내 3 계파의 지구당 위원장 171명을 포함하여 고문 · 전국구 의원 · 중앙 당직자 등 다수의 당직자들이 참여하여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 추대위원회를 결성한다.

아울러 김종필 최고위원을 명예위원장에, 민정계의 권익현, 민주계의 김재광, 공화계의 이병희를 공동 위원장에 그리고 대표 간사에 김윤환을 임명한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구가 237개로 171개의 지구당 위원장이 참여했다 함은 이미 김영삼 후보 측이 70% 이상을 확보했음을 의미했다.

이를 살피던 이종찬 후보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아울러 그동안 경선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들에 대해 숙의를 거듭하고 공정 경선이 아님을 역설하고 나선다.

박태준 최고위원의 대통령 후보 출마 시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와 안기부를 동원해 압력을 가한 정황, 김영삼이 대표최고위원직을 이용하여 지구당 위원장과 대의원들을 회유하고, 노태우 대통령의 측근이 공공연히 김영삼 지지를 호소하고, 김영삼이 대의원들에게 선물공세를 펼쳐도 그를 제어하지 않고, 특히 김종필 최고위원의 말 ‘3당 합당 시 차기 구도는 김영삼이었다’를 인용하며 강도 높게 경선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이종찬 후보는 경선의 불공정을 질타하면서 후보에 등록하였으나 전당대회 개최일 이틀 전인 5월 17일 롯데호텔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한다. 회견에서 이종찬 후보는 불공정 여건 속에서 경선을 거부할 수밖에 없고 자유경선의 본질을 훼손하며 강행되는 전당대회는 원천무효라 선언한다.

이어 이종찬 후보가 사퇴하고 실시된 전당대회에서 단독 후보인 김영삼은 대의원 66%의 지지를 받아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다.

경선 이후 후보로 선출된 김영삼은 당내 경선을 중도 포기한 이종찬 의원에 대해 중징계를 가하자는 일부의 의견에 거부의사를 표명하며 당내 화합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이종찬은 경선에 대해 위장경선이라 강도 높게 비판하고 8월에 탈당을 결행하기에 이른다.

탈당한 이종찬 의원이 신당 창당의 기미를 보이자 10월 10일 박태준 의원을 비롯하여 이자헌 · 김용환 · 박철언 · 장 경우 · 유수호 의원 등이 뒤를 따라 탈당한다. 이종찬 의원과 탈당파들이 신당을 추진하는 중이던 12월 12일 이종찬은 신당을 접고 정주영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노태우 대통령의 탈당

 민자당의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활동 영역을 넓히던 1992년 8월 31일 한준수 전 연기군수가 민주당 원내 부총무실에서 지난 14대 총선 당시 관권·부정선거의 실상을 양심선언을 통해 폭로하는 일이 발생한다.

한준수 전 연기 군수는 정부가 지난 14대 총선 시 여당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광범위한 관권·부정선거를 자행했다고 주장하며 당시 이종국 충남 지사가 내려 보낸 선거 관련 자금 2천만 원 중 십만 원 권 자기앞수표 90장과 선거지침서 15건 등의 공문서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그 뿐만 아니었다. 그는 연기군 자체 내에서 4천만 원 그리고 당시 민자당 후보였던 임재길 후보로부터 2천 5백만 원 등 총 8천 5백만 원을 친여 성향을 지닌 주민들에게 살포했다고 증언했다.

거기에 더하여 내무부장관의 선거 독려 전화 등을 통해 조직적인 관권·부정 선거에 대해 양심선언의 형태를 통해 폭로하기에 이른다. 폭로를 마친 한준수는 국회 박계동 의원실에서 한때 보호받는다.

여하튼 이 사건은 대선을 앞둔 민주당의 김대중에게는 호재로 작용한다. 김대중은 즉각 관권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에게 대국민사과의 극단 처방을 요구하고 나선다.

이에 1992년 9월 16일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는 한준수 전 연기군수가 폭로한 관권선거 의혹 사건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어, 중립 선거관리내각 구성을 위한 부분 개각을 요구한다.

김영삼의 개각 요구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비쳐졌다. 아울러 노 대통령은 이틀 뒤인 9월 18일 관권선거 개입의 폐습을 청산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격적으로 탈당함으로써 김영삼 후보에게 뜻밖의 타격을 주는 것으로 응수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탈당의 변은 그러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사정이 있었다. 즉 사돈이 경영하던 SK그룹에 대한 이동통신사업 허가 문제 등을 둘러싸고 김영삼 대선후보 측과의 갈등이 실제 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 전개 및 결과

 선거가 시작되자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안정과 개혁, 강력한 대통령과 강력한 정부, 신한국 창조를 앞세웠다. 반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는 대화합의 정치와 열린 정부론, 지역·빈부 간 위화감 및 적대감 해소를 내걸었다. 또한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후보는 내각제 개헌, 경제대국과 통일한국, 효율적 정부론을 내세웠다.

본격적으로 선거가 진행되자 초반에는 김영삼 후보가 확고한 우세를 유지하며 여유 있게 앞서나간다. 그러나 중반에 들어서자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후보가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치며 민자당의 지지표를 공략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를 감지한 민자당 지도부는 두 가지 전략을 구사하기에 이른다. 네거티브 전략과 함께 이미 깊게 골이 파인 지역감정을 선거의 이슈로 등장시킨다.

이어 정책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네거티브 전략이 판치기 시작한다. 민자당에서는 소위 김대중의 색깔론을 제기하고 민주당은 김영삼을 향해 변절론의 전략을 구사하기에 이른다.

12월 13일 김영삼 후보는 경기 지역 유세에서 ‘그동안 평양방송은 남한의 특정후보를 지지하라고 선동했고 그 후보는 김일성 노선에 동조하는 세력과 손을 잡았다. 책임 있는 대통령 후보라면 김일성 노선에 동조하는 세력과 손을 끊어야 한다.’며 색깔론을 제기한다.

이에 14일 김대중 후보는 충남과 경기, 서울로 이어지는 유세에서 ‘김영삼 후보가 스스로 30년 민주동지라고 말하는 나를 용공으로 몰고 있는데 대해 절망과 비애를 느낀다. 김영삼 후보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야당에서 여당으로 변신하더니 이제 패색이 짙어지자 30년 우정마저 배신하고 있다.’고 변절론을 제기한다.

여기에 더하여 민자당의 호남고립 작전이 감행되기에 이른다. 이는 다분히 충청과 강원 등 중부권을 의식한 전략으로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후보가 ‘정주영을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민자당의 선전은 나를 우롱하는 행위다’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

호남고립 전략이 진행되는 중에 일명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 발생한다. 초원복집 사건은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과 부산지역 각급 기관장 7명이 집권당 후보인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한 모임을 개최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 모임의 대화내용이 녹음되고 급기야 통일국민당의 김동길 선거대책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내용을 공표한다.

내용을 담은 도청 테이프가 상세하게 공개되면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 이 사건으로 그동안 느슨한 결속력을 보이던 부산과 경남 그리고 대구와 경북은 급격하게 세를 형성하게 되면서 소위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행어를 남긴다.

당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초원복집 사건으로 인해 김영삼 후보의 지지율을 원적지별로 부산·경남 출신의 경우 54.6%에서 56.3%로, 대구·경북 출신은 35.7%에서 41.3%로 급등시킨 것으로 조사되었다.

여하튼 선거 결과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194만여표 차로 누르고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지역별 득표를 살펴보면 서울·경기와 충청·강원에서 김영삼은 50% 내외의 지지를 받은 반면 영남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반면 김대중은 호남에서 몰표를 그리고 정주영은 강원과 충청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획득한다.

 대중 정계 은퇴 및 복귀

 선거가 끝난 다음날인 12월 19일 선거 결과를 주시하던 국민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 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김대중 후보가 민주당 마포당사에서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 장면이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또 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저의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합니다.

……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일반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

이제 저는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 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

……』

 선거결과에 대한 김대중의 깨끗한 승복은 이외의 현상이었다. 그는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패한 당시 그 선거에 대해 부정선거로 규정지으며 이어지는 총선에 불참을 선언한 바 있었다.

또한 지난 13대 대선에서 패하고 난 뒤에는 재야인사들과 함께 동 선거를 선거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따라서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고 원천적으로 선거 무효라고 강도 높게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런 그가 14대 선거에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깨끗하게 승복한 일은 김대중에게는 그의 말대로 유례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김대중이 눈물을 흘리며 정계 은퇴를 선언하는 모습에 김영삼 당선자는 물론 모든 정치권 인사들이 아쉬움을 표한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하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차원으로 김영삼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 영국으로 출국한다.

영국에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하다가 1993년 7월 귀국하여 1994년 12월 아시아 · 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통칭 아태재단)를 설립하고 전 필리핀 대통령인 코라손 아키노와 상임 공동의장에 취임한다.

아태재단은 남북통일, 아시아의 민주화 등과 관련된 연구·학술 활동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그와 정적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이면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난 시절 그가 보여주었던 행적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모 기관에서는 아태재단을 예의 주시한다.

결국 김대중은 1995년에 실시된 제1회 동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자를 지원하기 위한 전국 순회 유세를 펼치며 정계복귀를 위한 수순을 밟아간다. 아울러 민주당은 서울시장에 조순 후보가 당선되는 등 선전을 일구어낸다.

그와 관련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가 눈길을 끈다.

 『1995년 5월 28일 영국 BBC 방송은 이번 선거 결과를 김영삼의 굴욕적인 참패로 표현하면서 이를 계기로 김대중 씨가 다시 정치적 야망을 가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또 선거결과를 총선과 대선을 위한 디딤돌로 삼을 것으로 보도했다.

파이낸셜 타임즈 지는 민주당과 자민련이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대통령제 대신 내각제를 추진하여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릴 것이라 언급했다.』

 이러한 보도가 실현되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해 7월, 삼당 통합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김영삼 정부의 철학과 비전의 부족으로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정계복귀 선언 및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S. doctor 김  |  webmaster@ever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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