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선거사-33)제15대 국회의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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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doctor 김
  • 승인 2014.01.1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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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국회의원선거

(대한민국선거사-33)제15대 국회의원선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996년 4월 11일 실시한 선거로 선거의 공정성과 선거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1994년 3월 16일 공포된 새로운 정치개혁법인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통합선거법)’에 따라 실시되었다.

통합선거법은 기존에 실시되던 대통령 · 국회의원 · 지방자치단체장 · 지방의회의원 선거법을 하나의 법으로 통합한 것으로 누구든지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선거비용을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는 선거공영제를 대폭 확대하여 후보자가 부담하는 선거비용을 최소화하여 돈이 적게 드는 선거를 실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 법에 따라 치러진 선거 결과 신한국당은 34.5%의 득표율에 139석(지역구 107, 전국구 32), 새정치국민회의는 25.3%의 득표율에 79석(지역구 66, 전국구 13), 자유민주연합은 16.2%의 득표율에 50석(지역구 41, 전국구 9), 통합민주당이 11.2%의 득표율에 15석(지역구 9, 전국구 6), 무소속이 11.9%의 득표율에 지역구 16석을 차지한다.

이 선거에서도 13대 선거 이래 지속되어 온 영남, 호남, 충청의 지역 할거주의 현상이 의석수에 그대로 반영되면서 3당의 정치구도로 재편된다. 그런 연유로 13대와 14대에 이어 근소한 의석차로 여소야대 구도가 재현된다. 

민주자유당의 붕괴 

김영삼 대통령 취임 초인 1993년 3월에 단행했던 공직자 재산공개 결과 전·현직 국회의장 김재순과 박준규 · 국회의원 유학성 · 김문기 · 임춘원 · 정동호가 정계를 은퇴하거나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민자당을 탈당한다.

이어 지속되는 역사 바로 세우기 및 5공 청산 등을 기치로 내건 김영삼의 개혁 드라이브는 내적으로 민자당을 서서히 붕괴시킨다. 급기야 민정계 · 민주계 · 공화계의 3계파로 이루어진 민자당이 당시 유행했던 한 지붕 세 가족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뒤를 이어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당대표를 역임하였던 공화계의 김종필 대표도 당내 주류인 김영삼의 민주계가 1994년 말부터 개혁과 세계화를 내세워 일선 후퇴를 요구, 결국 1995년 2월 공화계를 이끌고 탈당하였으며 당내의 충청권 국회의원들도 동요하여 박준병 등이 탈당한다.

탈당한 김종필은 5월 31일 김복동 대표 체제하의 신민당과 합당하여 기존의 지지기반인 충청권에 대구와 경북 지역을 추가한다. 이어 제1회 지방선거에서 대전, 충남, 충북 그리고 강원도지사를 당선시키는 쾌거를 이룩한다.

정치판이 3김의 새로운 판으로 변화되고 있는 즈음에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발생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보유설은 19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자 증권가를 중심으로 나돌았었다. 아울러 김영삼의 핵심인 서석재 의원 등에 의해 노태우의 비자금 조성문제가 몇 차례 제기되었었다.

그 일이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에 의해 구체화된다. 박계동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주)우일양행 명의로 예치된 110억 원의 예금계좌 조회표를 제시하며 노태우의 비자금 4천억 원이 여러 시중 은행에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한다.

같은 날 신한은행 측에서 이 계좌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가 드러나자 검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한다.

노태우의 비자금이 폭로되자 김대중에게도 의혹의 눈길이 쏠린다. 그 당시 김대중은 국민회의 총재의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이었는데 김대중은 기자들과 만나 노태우에게 20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스스로 시인한다.

이와 관련하여 김영삼 대통령은 후에 기술한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에서 ‘김대중은 노태우씨가 먼저 폭로할까 봐 겁에 질렸는지 20억 원을 받았다고 먼저 발표했으나 그 금액이 20억인지 200억인지 의혹이 있다.’고 기술한다.

여하튼 김대중은 세간의 의혹에 대해 ‘20억 원 외에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했으나 아무 조건도 없으니 받으라고 했다’고 밝힌다. 이에 대해 민자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이 즉각 ‘20억+알파’를 밝히라고 요구하고 나서자 김대중은 김영삼 대통령을 향해 반격에 나서기 시작한다.

지난 대선 시 사용한 선거자금을 비롯하여 합당 시 노태우로부터 받은 자금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이 물러날 때 남은 통치자금의 사용처에 대해 밝히라고 공세를 강화하고 나선다. 이와 맞물려 침묵으로 일관하던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도 가세한다.

김종필의 공세는 막연히 설로만 대응하던 김대중의 경우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종필 총재를 비롯하여 많은 당직자들이 민자당 선대위의 요직에 앉아 있었던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 사람들을 토대로 선거에 지출한 사용 내역을 상세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며 압박을 가하고 나선다.

이 사건은 후일 총선과 대선에서 주요 이슈로 제기되는데, 이 사건으로 노태우는 포괄적 의미의 뇌물죄가 적용되어 1995년 11월 16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검찰에 구속 기소된다.

한창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정가에 소용돌이치는 11월 24일 오후 김영삼 대통령은 5.17쿠데타 관련자 처리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지시한다. 이는 다분히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겨냥한 지시였다.

이에 대해 전두환은 김영삼의 5.18특별법 제정과 관련자 사법처리 방침 천명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측근인 이양우 변호사를 통해 ‘만일 정부와 국회가 5.18특별법의 제정을 강행한다면 소급입법에 의한 정치 보복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헌정사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이며 국민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평을 발표한다.

이 논평과 더불어 ‘5.18사태는 13대 국회에서 1년 6개월여에 걸친 청문회를 통해 그 진상이 규명되었고 김 대통령도 참여한 당시의 4당 영수들이 정치적 종결을 선언한 바 있다’며 ‘검찰 역시 1년 2개월이라는 장기간의 수사 끝에 불기소처분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1월 30일 검찰은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 수사를 재개한다. 이어 12월 2일 소환조사를 거부한 채 대국민성명을 발표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간 전두환을 군 형법상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2월 3일 전격 구속·수감한다.

5·6공의 실세들과 완벽하게 선을 차단한 민자당은 그해 12월 6일 당무회의를 열어 세계화를 완성하겠다며 당 이름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기로 의결했다. 아울러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2월 6일 민주자유당을 신한국당으로 개명하며 15대 총선에 임한다. 

삼 김의 정면 대결 

총선이 시작되기 전에 신한국당에 악재가 터진다. 이른바 장학로 부정축재 사건이었다. 청와대 부속 실장이었던 장학로가 17개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을 국민회의의 주선으로 제보자 백모 씨가 폭로하기에 이른다.

백모 씨의 폭로로 평생 민주화 운동에 매진했던 김영삼을 수행했던 관계로 가난하기 그지없던 장학로의 동거녀와 그 가족의 재산이 장 씨가 청와대에 들어간 93년 이후 30억 원으로 늘어난 사실이 밝혀진다.

결국 이 사건은 검찰 수사로 이어졌고, 조사 결과 장 씨가 떡값과 사업상 선처 등을 명목으로 효성그룹 · 진로유통 등 기업과 정당 관계자 40여 명으로부터 27억6천만 원을 받았음이 드러난다. 이 사건은 그동안 한 푼도 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도덕성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시작되자 판세는 김영삼의 신한국당,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으로 정확하게 3등분된다. 이는 확고하게 고착화된 지역감정에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이 외에도 정계에 복귀하는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은 민주당 세력이 개혁신당과의 합당으로 1995년 12월 21일 만들어진 통합민주당이 참여하지만 그 세는 미미하였고 결국 15대 총선은 삼 김의 경연장으로 변한다.

15대 총선이 과열되는 사유로는 이어지는 97년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었다. 김영삼은 자신을 마지막으로 삼 김의 정계에서의 퇴진을 목표로, 김대중은 기어코 대권을 잡으려는 욕심, 김종필은 내각제를 통한 권력의 분점에 대한 목표가 충돌하면서 선거가 과열된다.

이와 관련하여 김영삼은 정치권의 세대교체론을 주창하며 이회창 · 박찬종 · 이홍구 등 이른바 빅 쓰리와 이재오 · 김문수 · 홍준표 · 안상수 등의 신진인사들을 영입한다. 아울러 이미 골이 깊은 지역할거주의를 분쇄하기 위해 수도권 공략에 초점을 맞추어 젊은 세대들에게 5·6공으로 대변되는 구시대 정치의 청산을 외쳐댄다.

그런 연유로 대구에서는 자유민주연합이 8석을 확보하는데 비해 신한국당은 2석 확보에 그치고 경북에서는 김윤환 의원의 선전에 힘입어 11석을 확보한다. 그러나 김영삼의 지난 정권의 청산과 맞물린 정치권 세대교체는 기존의 5·6공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당을 혁신해 역대 선거에서 야당의 강세지역이었던 수도권에서 승리를 이룬다.

서울에서 26석(국민회의 20석), 경기에서 18석(국민회의 10석), 인천에서 9석(국민회의 2석)을 확보함으로써 김영삼의 확실한 승리가 이루어진다. 

지역감정을 이용한 표적 공천 

15대 총선이 임박하자 김대중은 새로운 고민에 휩싸인다. 국회의원직을 유지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당연히 국회위원 직을 유지해야 했으나 김대중에게는 정계은퇴에 대한 번복 그리고 큰 아들인 김홍일에게 자신의 지역구인 목포, 신안 갑 선거구를 물려준 상태였고 부자간에 동일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이와 관련 김대중은 1996년 1월 12일 중진 언론인들과의 오찬에서 ‘꼭 국회에 들어갈 이유는 없다’면서 불출마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그러나 막판에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한다.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는 13번까지만 당선되어 낙선하고 만다.

한편 김대중은 자신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인사들로 자신의 뜻을 거스른 사람들에 대해 표적 공천을 실시한다.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이 구 민주당 의원들의 탈당을 유도하여 새천년 민주당을 만들자 이기택 · 김원기 등은 김대중을 따라가지 않고 개혁신당과 통합해 통합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를 빌미로 김대중은 통합민주당의 공동 대표였던 김원기를 비롯하여 이철과 유인태를 낙선시키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로 하여금 대항마로 출마토록 한다. 상대적으로 호남세가 강한 이철의 지역구인 서울 성북 갑에는 TV시사토론 사회자로 널리 명성을 얻고 있던 유재건을 또 유인태가 출마하는 도봉 을에는 유씨와 동고동락했던 설훈 부대변인을 출마시킨다.

김대중의 표적 공천으로 이철과 유인태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는데 표적공천의 대미는 전북 정읍에서 출마한 김원기의 경우였다. 김대중으로서는 다른 여타의 인사들보다 김원기의 경우 반드시 본을 보여주어야 했고 결국 자신의 비서 출신으로 정읍농고 출신의 정치초년병인 윤철상을 공천한다.

선거에 임한 윤철상은 앞뒤 가리지 않고 한마디 하고 나선다.

‘선생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이른바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황색바람과 김원기의 나 홀로 서기의 대결이 시작된다. 외관상으로 바라볼 때 어느 누가 봐도 게임 자체가 되지 않아보였다. 따라서 선거 초반에는 김원기의 나 홀로 서기가 성공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좌시할 김대중이 아니었고, 김대중이 유세지원을 빌미로 정읍을 방문하여 윤철상을 무개차에 태워 가두연설을 하고 또 그의 부인인 이희호가 수시로 정읍을 방문 총력전을 경주하자 황색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김원기는 김대중을 배신한 표리부동한 인사로 몰린다.

그리고 개표를 마치자 김원기는 일반 국민들이 경악할 정도로, 그야말로 정치 초년병인 윤철상에게 2만여 표 차이를 내며 더블스코어로 참패한다. 

15대 총선의 이변 

13대 총선 이후 확실하게 지역할거주의로 고착된 15대 총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난다. 김대중의 본거지인 호남에서, 이른바 황색바람에서 당당하게 살아남고, 현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옥중 출마해서 당선된 경우였다. 

먼저 김대중의 아성이었던 호남에서 신한국당이 유일하게 한 석을 건지는 일이 발생했다.

15대 총선에서 광주, 전남·북 37개 선거구에서 전북 군산을 선거구를 제외한 전 지역을 새정치국민회의에서 휩쓸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군산 일부와 옥구군의 도농통합으로 변한 동 선거구에 14대 국회의원으로 김대중의 법률 자문 등 핵심이었던 옥구 출신의 강철선 의원을 공천하였으나 신한국당의 강현욱 후보에게 고배를 마신다.

전북 지역은 13대 선거 때는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이 전석을 석권하였고, 신민당 대표최고 위원이었던 이철승도 황색바람에 밀려 비참하게 낙선의 고배를 마신 지역으로 이어지는 14대 총선에서는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남원에 출마한 양창식과 무주 진안 장수에 출마한 황인성이 당선 되는데 그친다.

노태우의 6공화국 들어 관선 전북도지사와 농림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던 강현욱은 김대중이 손봐야 할 한 사람으로 14대 총선에서는 평민당의 채영석 후보에게 그리고 이어지는 전북도지사 선거에서는 김대중의 지원을 받는 유종근 후보에게 패한다.

그러한 그가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고 본격적으로 선거전에 뛰어들자 그 누구도 그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정치 거목이었던 이철승을 비롯하여 호남에서 황색바람에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무릎을 꿇었던 터였다.

그러한 악 조건 속에서 강현욱은 선거 기간 내내 매일 20시간 이상씩 강행군을 감행한다. 속된 말로 몸으로 유권자를 접촉하여 지난 선거에서 떨어진데 대한 동정심에 인물론으로 파고 들어 결국 강철선에게 신승을 거두며 유일하게 호남에서 승리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그러나 김대중의 벽을 확실하게 실감한 강현욱은 아쉽게도 김대중이 정권을 잡자 기어코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 16대 총선에서 새로이 당선되고 이어 전북 도지사로도 영광의 날을 기린다. 

다음은 신한국당의 텃밭인 경북에서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민심 이반이 현실로 나타난다. 포항시 북구에서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한 허화평이 당선되는 사건이었다.

총선에서 옥중 출마하여 당선된 경우는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그동안까지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자유당 출신으로 국회부의장이었던 이재학이 3·15 부정선거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그해 실시된 제 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옥중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었다.

이후 10대 총선에서 임실·남원·순창에서 출마한 손주항과 고흥에 출마한 김수, 11대 때 서울 성동에서 출마한 조덕현 그리고 14대 총선에서 경남 거창에서 출마하여 당선 된 이강두가 있었다.

그러나 하화평의 출마는 이들과 맥을 달리한다. 이들의 출마 및 당선은 주로 개인의 관점에서 읽혀지는데 허화평의 경우는 정권의 차원에서 인식되었다.

허화평은 전두환의 5공화국의 핵심 인물로 12.12사건과 관련하여 선거전인 2월 8일 정호용, 허삼수 등과 함께 내란모의 참여죄, 반란모의 참여죄로 구속된 바 있었다. 이에 대해 허화평은 동 선거에 정호용, 허삼수와 함께 명예를 찾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옥중출마를 선언한다.

옥중에 있는 그를 대신하여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딸이 귀국하여 대리 등록하고 그의 부인과 딸이 선거에 올인하기 시작한다. 당시 신한국당의 후보로는 명지대 교수와 대통령 자문기구인 21세기위원회 간사위원인 윤해수였다.

이른바 구여권의 핵심과 신여권의 핵심인 두 사람의 격돌로 비화된 선거에서 허화평 후보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윤해수 후보를 물리치고 옥중에서 당선된다. 이는 김영삼 대통령이 행한 지난 정권과의 차별화에 따른 지역민심의 이반에 따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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