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남영진] 아직도 끝나지 않은 포클랜드 (말비나스) 전쟁
[칼럼 남영진] 아직도 끝나지 않은 포클랜드 (말비나스) 전쟁
  • 남영진 논설고문/행정학 박사
  • 승인 2018.04.2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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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남영진 논설고문]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항구다. 그러나 시를 돌아 동남쪽으로 흐르는 누런 물은 바닷물이 아니라 강물이다. 이 물이 340km나 더 남쪽으로 나가야 대서양을 만난다. 이 바다에서 남극쪽으로 400km 바로 앞에 그 유명한 포클랜드 제도(Falkland Islands,l스페인어로는 말비나스 Malvinas)가 있다. 1982년 아르헨티나와 영국 간에 전쟁을 벌인 섬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제공항 실내에 세워진 포클랜드 위령표지석(사진=남영진 논설고문)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제공항 실내에 세워진 포클랜드 위령표지석(사진=남영진 논설고문)

지난 3월초 남미 남부의 파타고니아빙하 관광을 1주일 하고나서 다시 칠레로 돌아왔다. 산티아고에서 4일간 쉬고 곧바로 이과수폭포 관광에 나섰다. 지난 3월15일 산티아고에서 이과수폭포를 가려고 먼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들렀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3국경에 위치한 이과수폭포는 아르헨티나 쪽에서 접근하기가 가장 편리하다. 공항에 도착하니 이과수행 비행기가 폭우로 결항이라 다른 비행기로 대체 한단다. 흔한 일이란다.

공항대합실을 한 바퀴 둘러보다 조그만 표석을 발견했다. 기념비나 표석은 보통 외부에 있고 실내엔 잘 설치하지 않아 좀 낯설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 희생된 아르헨티나 군을 기리는 추모비였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잊을 수 없듯이 이들도 그 전쟁의 상처가 깊이 남아있구나...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한 직후 터진 전쟁이라 당시 편집국 전체가 전쟁을 치르듯 흥분하던 상황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포클랜드 제도는 1833년 이후 영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가깝다. 서울과 부산거리니 우리에게 대마도와 같은 섬이다. 아르헨티나는 1982년 포클랜드 제도의 말비나 섬을 점령해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75일간 전쟁으로 아르헨티나 군인 649명과 영국 군인 255명이 전사했다. 약 3천 명 주민 대부분이 영국계라 아직도 영국령 자치정부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포클랜드 자치정부는 2013년 3월 주민투표를 시행해 99.8%의 찬성률로 영국령 잔류키로 재결정했다. 
 
포클랜드 제도에 첫 발을 디딘 이들은 17세기 말 영국 탐험대다. 이 탐험대는 당시 해군제독이던 ‘포클랜드 자작’의 이름을 따 섬 이름을 지었다. 영국이 먼저 포클랜드 제도에 발자국을 남긴 '기록'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1704년 처음 살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착민들은 1766년 스페인으로부터 보상을 받고 철수하고 그 후 50년간 스페인 관할 하에 있었다. 1766년 같은 해 영국인들도 포클랜드 제도에 들어왔으나 1774년 경제적인 문제로 퇴거한다.

1816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이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이때 영국이 다시 포클랜드 제도를 바다표범과 고래잡이 산업의 기지로 만들고자 했고, 영국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는 이에 위협을 느껴 1826년 이 제도의 영유권을 선언한 뒤 2년 뒤 군대를 파견한다. 

이에 세계의 제해권을 갖고 있던 영국은 1833년 전함을 보내 이 섬을  점령하고 아르헨티나계 주민들을 모두 강제 퇴거시키고 1천명 이상의 영국인들을 이주시킨다. 당시 갓 독립한 아르헨티나는 전 세계 인구의 25%를 지배하던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의 군대와 맞설 수가 없었다. 영국이 아편전쟁 후 홍콩을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이후에도 계속 작은 다툼이 있어왔다.
 
아르헨티나는 150년이 지난 1982년 4월 2일 영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며, ‘말비나스 제도’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전격 침공했다. 오랫동안 영유권 협상을 진행해봤자 영국의 소극적인 협상태도로 진전이 없자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진격 명령을 내린다. 갈티에리는 추락하던 경제 상황을 타개하고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자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영국은 즉시 기동부대를 파견해 4월 26일 포클랜드제도에서 남극쪽 1,500 km에 있는 남조지아 섬을 우선 탈환해 교두보를 확보했다. 근해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고 또 남극대륙에의 전진기지로서의 포클랜드 방위를 위해서지만 ‘철의 여인’ 대처수상은 쇠약해져가는 ‘대영제국’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즉각 반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5월 21일 해병대와 공수 부대를 동포클랜드 섬의 서쪽 끝인 산 카를로스에 상륙시켜 아르헨티나 정예군과의 전투 끝에 재탈환했다. 개전 75일 만인 6월14일 전쟁이 끝났다. 아르헨티나 공군 주력기 미라주는 영국 공군 주력기인 해리어보다 성능은 훨씬 뛰어났지만 발진에 길고 넓은 활주로가 필요한데 해리어기는 간단히 수직 이착륙이 가능했다. 아르헨티나는 영국 함대에 프랑스제 엑소세 미사일로 맞섰으나 공군전에서 영국에 패했다. 

이 전쟁은 “포클랜드에서의 휴전과 아르헨티나군의 철수에 양측이 합의했다”는 ‘항복’이라는 표현이 없는 아르헨티나측 성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유엔으로 넘겨진 포클랜드 영유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양국의 피해는 컸다. 영국은 체면을 유지했지만 사상자 452명과 항공기 25대, 함정 13척을 잃었으며 15억 달러의 전비를 써서 큰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됐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거의 국력을 총동원했지만 사상자 630명과 항공기 94대, 함정 11척을 잃고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몰려 갈티에리 대통령이 사퇴했다. 미국은 조급히 영국을 지원하고 나서 형제국이라던 중남미 라틴아메리카 제국의 반미감정만 고조시켜 신뢰가 크게 추락했다.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를 테러집단인양 비난해 이 때문에 미 대륙의 다른 국가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미주기구 (OAS)에서는 아직도 이 섬의 아르헨티나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 마음속엔 아직 ‘말비나스 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 같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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