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남영진] 연해주 역사탐방-②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뻬치카‘, 최재형 선생을 기리며
[칼럼 남영진] 연해주 역사탐방-②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뻬치카‘, 최재형 선생을 기리며
  • 남영진 논설고문/행정학 박사
  • 승인 2018.05.2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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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남영진 논설고문]일제 침략시기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꼽다보면 안중근 김구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이시영 김좌진 홍범도 윤봉길 이봉창 등을 만난다. 그러나 안중근을 길러낸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과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지낸 최재형 선생은 잘 모른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1920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정벌 때 우스리스크 생가에서 체포돼 일찍 사살 당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상해 임시정부의 요원이나 간도 무장투쟁의 선봉장들은 해방 후까지 살아있던 분들이 많다. 연해주 쪽은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적군, 백군에 의해 번갈아 처형당했다. 연해주 신한촌에 살던 고려인들 18만 명이 1937년 스탈린의 지시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가기 전해인 1936년에도 2천여 명의 고려인 지도자들이 이미 처형당해 지도자들도 거의 남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은 37년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 시까지 끌려가 극장 수위를 하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박물관으로 꾸미고 있는 최재형 선생 생가(사진=남영진제공)
박물관으로 꾸미고 있는 최재형 선생 생가(사진=남영진제공)

지난 5월11일-13일 동북아평화연대의 연해주 역사탐방단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3시간의 버스를 타고 신한촌이 있던 북쪽 우수리스크를 먼저 찾았다. 이상설선생 유허비에 헌화한 뒤 최재형 선생이 1년간 기거하다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최선생 생가를 방문했다. 큰 길가 러시아식 단층건물. 내부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한창 수리 중이었다. 2014년 재외동포재단이 매입했단다.

연해주 교민들은 ’독립운동가의 횃불‘이라는 그를 ’최뻬치카선생‘이라 부른다. 러시아식 ’벽난로‘라는 뜻이니 고려인들을 따뜻하게 보살핀 ’대부‘라는 뜻이다. 수리중인 생가 내부에 들어가보니 바닥과 벽은 다 뜯었는데 방 입구의 뻬치카는 아직 남아 있었다. 길 건너 100년이 넘은 극장이 그대로 남아 있고 5분 거리에 1919년 전로고려인중앙총회가 열렸던 실업학교도 그대로 학교로 쓰이고 있다.

1919년 전로고려인중앙총회가 열린 실업학교가 그대로 초중등 학교로 쓰이고 있다(사진=남영진제공)
1919년 전로고려인중앙총회가 열린 실업학교가 그대로 초중등 학교로 쓰이고 있다(사진=남영진제공)

일제 강점기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 피해오거나 자금을 구하려 몰려들었다. 그만치 연해주가 다른 곳보다 생활에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이승만 김구를 빼고는 연해주를 거쳐 가지 않은 독립운동가는 없다”고 말한다. 이곳 독립운동사를 줄줄 꿰고 러시아 역사까지 재치 있게 설명해주던 현지 가이드 ’담양댁‘이 최재형선생기념사업회 회원이다. 아직도 최선생은 5만 연해주 교민들의 정신적인 지주임이 분명하다.

최재형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9살 때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 고려인 첫 마을인 지신허로 이주했다. 가출해 러시아학교에 들어갔다가 마을 바로 앞의 포시예트 항구에서 러시아 상선 선장을 만나 양자로 들어가 1871년 12살부터 어린 나이에 6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문물을 넓혔다. 1881년 연추(지금의 핫산지방 크라스키노시)로 옮긴 가족과 재회한 뒤 러시아어를 잘해 22세 때 연해주 철도,도로 건설국 통역이 됐다. 1893년부터 한반도가 일제에 병합되고 난 다음해인 1911년까지 군수인 연추 도헌을 지냈다.

그는 자기 자산을 내놓고 주위 자금을 모아 1895년부터 연해주 핫산, 연추, 블라디보스톡 가까운 신한촌등 고려인들이 사는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우고 졸업생을 대도시 상급학교로 진학시켰다. 1896년에 러시아 마지막황제인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참석해 훈장도 받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제2의 조국인 러시아를 위해 통역장교로 러시아해군 소위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나자 박영효의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와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조직했다. 1908년 4월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해 참모총장에 취임한 뒤 의병활동을 지원했다. 이들 의병들은 두만강 넘어 함경도 경원 회령 등 북쪽을 공략하기도 했고, 배로 포시예트를 빠져나가 동해를 거쳐 나진 종성 등 동쪽으로 국내로 침공했다. 이 대한의군의 참모총장 자격이었던 안중근의사가 1909년 연추에서 12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고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한 것이다.

안중근은 최재형의 집에서 이토의 사진을 벽에다 걸어놓고 사격연습을 했다고 후에 최선생의 딸인 올가씨가 회고록에서 증언한 바 있다. 안중근의사가 현지에서 체포된뒤 뤼순(旅順)감옥소에서 재판을 받을 때 “나는 대한의군의 중장이다. 전시중 적군의 수괴를 사살했으니 일반 살인범이 아닌 포로로 대우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한 것도 이 의병군 참모총장 자격으로 말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군에게는 최선생을 죽일 빌미가 됐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연해주 지역은 니콜라이황제를 옹립하는 백군(白軍)이 러시아혁명 적군(赤軍)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이 와중에 1920년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톡을 점령하고 시베리아로 출병하면서 러시아와 고려인의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이 때 일본군이 일본에서 타고 왔던 군함 일부가 1904년 러일전쟁때 마산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52~1934)에게 격파당해 빼앗겼던 발틱함대의 배였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1919년 국내의 3.1만세운동직후 최선생은 신한촌을 중심으로 다시 독립군의병을 조직하려고 노력하다 1920년 4월5일 우스리스크의 생가에서 일본군에 체포돼 4월 7일 왕바실재 언덕에서 사살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최재형선생의 유해는 올해 98주기가 지났는데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1909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총살된 안중근의사의 유해도 109년이 넘도록 발견치 못하고 있다.

최선생의 큰 아들도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됐고 작은 아들까지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최선생 사후 17년간 연해주에 살았던 부인 최엘레나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해 키르키즈스탄의 수도 비쉬케크에서 살다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 훌륭한 선조들의 덕분에 1945년 반쪽 독립이라도 됐다. 이제 이들의 한을 풀어줄 한반도통일을 이루는 건 후손들의 몫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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