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남영진] 연해주 역사탐방-③ 헤이그 평화회의 3인의 밀사중 제일 어렸던 이위종(李瑋鍾)을 기리다
[칼럼 남영진] 연해주 역사탐방-③ 헤이그 평화회의 3인의 밀사중 제일 어렸던 이위종(李瑋鍾)을 기리다
  • 남영진 논설고문/행정학 박사
  • 승인 2018.06.0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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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남영진 논설고문]6월6일은 현충일이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들이나 한국전쟁 때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날이다. 이날 오전 10시 정부의 공식기념식이 있고 전국에는 사이렌에 맞춰 묵념을 한다. 초등시절 휴일인 이날 아침부터 동네 앞 냇가에 가서 손으로 물고기를 잡으려 돌을 들쳐보니 ‘뿌구리’(표준말 동사리) 한마리가 버티고 있었다. 이 고기는 손에 몸에 닿을 때까지 도망가지 않는 뚝심 있는 고기였는데 손을 넣다가 사이렌이 울려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고기가 없어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려인문화센터 뜰에 있는 안중근기념비 옆에 선 민주화교수협의회 초대의장 유초하 교수(사진=남영진)
고려인문화센터 뜰에 있는 안중근기념비 옆에 선 민주화교수협의회 초대의장 유초하 교수(사진=남영진)

정부기관이나 공공단체 말고도 협회나 시민단체 등의 기념식 국민의례 때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뒤에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시간을 갖는다. 이때 순국선열이라면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생각나지만 현충일이 6,25가 들어있는 ‘보훈의 달’ 6월이라 보통 한국전쟁때의 전몰장병을 더 기린다. 지난 4월 블라디보스톡 우스리스크 하산등 러시아 연해주지방 역사탐방을 할 때에야 최재형 안중근 이상설 이위종 등 독립운동가들의 과거가 되살아났다.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역사를 더듬었다. 101년 만에 마주대한 역사였다. 부사(副使)격인 48세의 이준(李儁) 열사는 대한제국의 검사로 서울에서 고종의 밀지를 갖고 연해주에서 활동중인 37세의 정사(正使) 이상설(李相卨)을 만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네델란드까지 간다.

그들은 도중에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그에서 대한제국의 주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李範晉)의 아들로 주재하던 이위종(李瑋鍾)을 만나 통역관으로 데려간다. 이준열사는 헤이그에서 병을 얻어 분사하고 이상설은 연해주로 돌아와 일제 강점기인 1920년까지 독립운동을 펼치다 죽는다. 마지막 남은 이위종은 러시아공사관 폐쇄후 연해주로 돌아와 이상설 밑에서 활동하다 1921년께 죽는다.

이상설은 24세 때 갑오문과에 급제해 불과 2년 뒤 성균관장에 임명된 수재였다.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한 철회운동을 주도하면서부터.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에는 고종 황제에게 “이래도 나라가 망하고 저래도 나라가 망할 바에야 죽음으로써 조약 인준을 거부해 선대가 남긴 책임을 완수하는 게 낫다”고 뼈아픈 상소를 올렸다. 이상설은 특사 활동 중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 땅에 묻은 뒤 유럽을 순회하며 외교활동을 벌이다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 의병을 규합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그것이었다. 1914년에는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 통령을 맡았다. 1916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을 얻은 그는 이듬해 3월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한다. 향년 47세. 헤이그 특사에 대한 일제의 궐석(闕席)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지 10년 만이었다.

연해주 수이푼강가에 있는 이상열 선생 유해비 (사진=남영진)
연해주 수이푼강가에 있는 이상열 선생 유해비 (사진=남영진)

이번에 가본 연해주 북쪽의 우스리스크 수이푼강가에 세운 하얀 화강암의 유해비에 새겨진 유언은 이러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魂)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의 유골은 이 강에뿌려져 동해를 건너 고향에 왔으리라.가

막내 이위종은 1887년 서울생. 1905년 11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돼 각국 공사관이 폐쇄되고 주재 공사에게 철수령이 내렸으나 주 러시아 이범진공사는 아들 이위종과 함께 철수하지 않고 러시아 수도 빼테르부르그에 체류한다. 고종은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에 이준은 친서와 신임장을 주어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미 1년 전에 망명해 와 있던 이상설과 만나고 함께 빼테르부르그에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밀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1907년 6월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한국 대표로서 공식으로 회의장에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한다. 이 활동에는 프랑스어와 영어에 유창한 이위종이 교섭과 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열강의 반응은 냉담했다. 반면에 신문기자들과 네덜란드의 현지여론은 한국대표들의 활동에 호의적인 측도 있었다.

이위종은 7월 9일에 열린 각국신문 기자단의 국제협회(國際協 )에서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강연을 했다.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은 일본이 무력으로 강제 체결된 것으로 무효이며, 한국의 국민과 황제는 한국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열망하고 있으므로 세계가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해 감명과 찬사를 받았다.

이위종은 이상설을 따라 영국ㆍ프랑스ㆍ미국 등을 순방하고 러시아로 돌아갔으나 1910년 경술국치후 아버지 이범진이 권총으로 자결하자 장례를 지르고 연해주의 이상설 밑으로 가서 군정부(軍政府)와 권업회(勧業會)활동 등 구국운동에 생애를 바쳤다. 1차대전 때에는 러시아군대에서 장교로 활동하다 전사통지서를 받았으나 최근 1921년까지 활동한 기록이 발견됐다. 사망지는 확실치 않으나 최근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고손자가 나타났고 형 이기종의 후손들과도 연락이 된다고 한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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