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남영진] 캐나다동부기행-② 캐나다의 작은 수도 , 오타와(Ottawa)
[칼럼 남영진] 캐나다동부기행-② 캐나다의 작은 수도 , 오타와(Ottawa)
  • 남영진 논설고문/행정학 박사
  • 승인 2018.06.2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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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남영진 논설고문]캐나다의 수도는 토론토가 아니라 오타와다. 인구는 90만 명을 조금 넘어 530만 명의 토론토보다 훨씬 작지만 총독관저가 있고 국회의사당이 있는 수도다. 인구로는 토론토, 몬트리올, 캘거리에 이어 캐나다에서 네 번째다. 미국의 수도도 뉴욕보다 훨씬 작은 워싱턴D.C.다. 호주도 시드니가 아닌 멜버른, 브라질도 사웅파울로나 리우데 자네이루가 아닌 작은 내륙도시 브라질리아이다.

초등시절 수도 외우기 게임할 때 제일 헷갈리는 곳이 남아공화국이었다. 요하네스버그, 케이프타운, 프리토리아가 행정 입법 사법부를 나누어 가졌으니 헷갈릴 수밖에. 칠레도 대통령이 있는 수도는 산티아고이지만 국회는 해안도시 발파라이소에 있어 대통령취임식은 여기서 한다. 그러나 캐나다의 수도는 확실한 오타와다. 아직도 영국연방에 속해 있어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여왕이어서 상징적인 1인자는 영국여왕이 임명하는 총독이다.

대학친구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7명의 대학동기 부부들은 토론토에서 현지 성당미사도 보고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물세례도 맞아보고 온타리오호숫가에서 아이스크림도 맛있게 먹었다. 방문 4일째 5월26일 드디어 2박3일 일정의 캐나다 동부 여행에 나섰다. 현지 최대의 한인여행사인 파란여행사에서 마련한 리무진버스를 타고 오크빌 친구집에서 가까운 미시사가에서 떠났다. 도중에 식민지 수도였던 킹스턴근처에서 중국식 점심뷔페로 배를 채웠다.

영국과 프랑스간의 7년 전쟁 끝에 1763년 영국이 이겨 프랑스 식민지 퀘벡을 손에 넣고 프랑스인과 인디언원주민을 박해했다. 영국 식민당국은 10년 후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서둘러 프랑스어 사용을 허용하는 등 프랑스인 원주민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친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 이어 나폴레옹이 유럽대륙을 석권하자 마지막 러시아와 섬나라 영국만이 육지와 바다에서 나폴레옹 군과 대적하고 있었다. 이틈을 타 1776년 독립한 미국이 1812년 캐나다를 침공해 토론토를 거쳐 식민지 수도였던 킹스턴을 점령한다.

아이작 블락 장군이 이끄는 캐나다의 영국식민지군의 반격으로 미군을 쫒아내 아이작장군은 나이아가라폭포를 넘어 미국으로 진격했다. 뉴욕주와 수도인 워싱턴까지 점령해 국회의사당과 대통령궁을 불사른다. 미국의 4대 매디슨대통령은 북쪽의 메릴랜드까지 도망갔다. 벨기에의 벤뚜회담에서 영, 미는 “기존 국경선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선에서 휴전했다. 이후 미국은 ‘유럽대륙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먼로대통령의 비개입 외교정책인 ‘먼로주의’를 채택한다.

미군의 침략을 우려해 만든 오타와강의 리도운하(사진=남영진제공)
미군의 침략을 우려해 만든 오타와강의 리도운하(사진=남영진제공)

미국의 침입을 우려한 영국군은 1826년에 군사적 목적으로 온타리오 호수와 오타와 강을 연결하는 리도 운하(Rideau Canal)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오타와의 개척자였던 영국인 이름을 따서 바이타운(Bytown)으로 불리었다. 인구가 점차 늘어난 1854년 영국식 이름을 버리고 원주민 언어인 오타와 강의 이름을 따서 도시명을 바꾸었다. ‘오타와’는 아메리칸 원주민 중 하나인 알곤킨(Algonquin)의 언어로 '무역'이라는 뜻이다.

19세기 “영국여왕의 영토는 지구상에서 해가 지지 않는다.”랄 정도로 전 세계를 지배하던 빅토리아여왕은 미국이 다시 침략할 것을 우려했다. 미군이 1812년처럼 온타리오호수를 넘어 토론토와 킹스턴를 점령하면 센트 로렌스강을 따라가면서 킹스턴 몬트리올 퀘벡을 대서양까지 바로 침공할 수 있다. 온타리오 토론토의 영국인과 퀘벡의 프랑스간의 잦은 불화도 골치였다. 그래서 서둘러 1867년 2개주와 해변의 노바 스코시아주 에드워드 아일랜드주 등 4개주를 합쳐 캐나다합중국으로 독립시킨다.

이때 수도를 어디로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미국의 침략을 막기 쉽고 영, 불인 간에 화합. 이 두 가지 문제였다. 영국인이 살고 있는 킹스턴, 토론토도 문제고 프랑스인이 대부분인 몬트리올과 퀘벡도 문제였다. 오타와는 신생국 캐나다의 수도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생긴 지 겨우 12년밖에 되지 않은 도시였다. 1857년 12월 31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오타와를 수도로 선정했다.

오타와 총독관저인 리도홀 앞에서(사진=남영진제공)
오타와 총독관저인 리도홀 앞에서(사진=남영진제공)

1860년부터 오타와 강과 리도 운하가 만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의사당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다. 의사당 건물은 1867년 캐나다가 하나의 국가로 탄생될 때까지도 완성을 보지 못했고, 그 후 12년이 더 걸렸다. 미국과의 나이아가라 국경에서 훨씬 북쪽 내륙에 위치해 방어하기가 쉬운 곳이다. 결국 영국인 지배의 온타리오주와 오타와강의 작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프랑스인이 사는 퀘벡주가 있는 국경도시 오타와에 웅장한 총독, 총리관저와 국회의사당이 들어섰다.

그래도 오타와는 온타리오 주에 속해 있으니 영어사용권에 대한 배려를 한 셈이다. 17세기 캐나다 동부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져 일부 상인을 제외하고는 이곳을 찾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19세기에 이르러 뉴잉글랜드인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1855년 강 건너 북쪽의 ‘가티노_오타와’(Gatineau-Ottawa)지역을 통합해 불어를 쓰는 주민들과 영어를 쓰는 주민들을 공유하게 됐다. 영,불 통합의 상징도시가 된 셈이다.

1860년 영국 황태자가 참석해 의사당 정초식을 올렸고 드디어 1867년 7월 1일, 몽크 총독이 독립선포문을 낭독했다. 얼마 전에 완공된 해저 케이블을 통해 대서양을 건너온 빅토리아 여왕의 축전도 발표됐다. 그러나 1916년 화재로 의사당 건물은 평화의 탑(Peace Tower)만 제외하고 다 타버렸다. 지금 건물은 예전대로 복원한 것이며 화재 당시 평화의 탑에서 떨어져 깨진 종이 뒤뜰에 보관돼 있다.

1960년대부터 1980년까지 오타와 수도권은 부동산개발 붐이 일었고 경제 성장과 동시에 오타와의 도시 경계는 계속 확장됐다. 1990년대 이후 소프트웨어 산업과 전자통신 산업이 밀집한 첨단도시가 되어 '북부의 실리콘벨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도심은 건축물에 고도제한이 있어 예쁜 스카이라인이 형성돼 있다. 도시 곳곳에 1,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캐나다군을 기리는 평화의 탑이 서있어 우리나라와의 혈맹관계임을 ‘문뜩’ 일깨워준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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