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남영진] 캐나다 동부기행-④ 프랑스가 영국에 빼앗긴 ‘통한(痛恨)의 퀘벡’(Quebec)
[칼럼 남영진] 캐나다 동부기행-④ 프랑스가 영국에 빼앗긴 ‘통한(痛恨)의 퀘벡’(Quebec)
  • 남영진 논설고문/행정학 박사
  • 승인 2018.07.09 11: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문가 칼럼=남영진 논설고문]몬트리올서 퀘벡으로 가는 길은 3시간 걸리는 고속도로이지만 센트 로렌스강을 따라 배들이 많이 오고 내린다. 프랑스어를 쓰는 퀘벡주의 주도이자 북미 유일의 성곽도시다. ‘뉴 프랑스’, ‘캐나다의 파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이 유럽에 알려지자 16세기 네델란드가 뒤따라와 남미를 석권한 스페인을 피해 지금의 뉴욕지방에 뉴암스텔담을 건설했다. 이어 영국이 들어와 뉴 암스텔담을 양도받아 뉴욕을 세우고 미국 동부해안 13개주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퀘벡 구시가지 프랑스식당(사진=남영진제공)
퀘벡 구시가지 프랑스식당(사진=남영진제공)

프랑스가 곧 식민지개척에 가세했다. 1534년 프랑스의 탐험가 자끄 까르테에가 대서양에서 영국 식민지 북쪽의 퀘벡으로 들어와 센트 로렌스강을 따라 몬트리올까지 진출해 이 일대를 프랑스 왕령으로 선언했다. 몬트리올 구시가에 있는 까르티에 광장이 그의 기념물이다. 이어 1604년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이 남쪽 펀디 만 일대를 탐험하고 원주민과 모피를 교환해 겨울나는 법을 익힌 뒤 일시 정착했다.

프랑스인들은 미국 쪽 영국인들의 북상에 위협을 느껴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세인트 로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1608년 모피 교역소를 새웠는데 여기가 퀘벡이 된다. '퀘벡'은 북미 원주민 언어인 알곤킨어로 '좁은 물길'을 의미하는 <kepék>에서 유래했다. 대서양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와 좁아진 천혜의 군사적 요충지역이다. 캐나다에서 제일 넓은 주지만 인구는 토론토가 있는 온타리오주에 이어 두 번째.

북쪽에는 이로쿼이, 크리족들이 조금 살고, 최북단 지역엔 이누이트족(에스키모족)이 거주한다. 원주민 동네가 퀘벡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원주민 아기들의 엉덩이엔 아직도 푸른 몽골반점(mongoloid spot)이 나타나 빙하시대에 얼음이 언 베링해협을 넘어온 몽골족의 후예라고 추정한다.주의 표어는 "Je me souviens (나는 기억하노라)."이다.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패해 나라를 빼앗긴 것을 기억하자는 뜻으로 이해된다. 주도인 퀘벡은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어져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성벽(citadel) 안에 있는 구도시는 옛날 그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절벽밑에 프랑스인 부두노동자들이 살던 숙소와 창고, ‘승리의 노틀담성당’ 등 석조건물이 보존돼 있고 여기에 좁다란 골목에 작은 바와 커피숍이 몰려있어 ‘쁘띠 마르세유’풍이다. 여기서 우리 일행 7명이 나누어 시킨 프랑스풍 폭립 스테이크와 커피가 나름 가성비가 좋았다.

구시가지 골목풍경(사진=남영진제공)
구시가지 골목풍경(사진=남영진제공)

성안에는 높은 언덕에 세워진 샤토 프롱트낙 호텔이 대표적 관광지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도깨비 공유와 신부 김고은이 함께 나온 후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졌다. 올해 126년 된 고건물인데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입구에 ‘스타벅스 커피점’까지 들어가 있어 현대와의 조화가 쌩뚱맞다. 1942년 2차대전이 한창인 때 루스벨트대통령과 처칠수상이 만나 전후 처리방향을 논의했던 회담 장소다.

프랑스인이 정착하자마자 센트 로렌스 강이 좁아진 절벽위 다이아몬드 곶에 시타델(citadel)요새를 세우고 포대를 설치했다. 지금도 옛날의 요새와 성벽이, 그리고 오래된 시가지 건물들과 좁은 골목들이 보존되어 있어 아주 낭만적이다.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세운 유일한 성곽도시답다. 여기서 강을 따라 올라가 1642년 모피교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몬트리올은 캐나다 제일의 상업도시였으나 분리운동 이후 돈이 토론토로 빠지나가 2위로 내려앉았다.

이후 이 일대는 식민지화가 진행돼 ‘태양왕’ 루이14세 때의 총리인 리슐리외 추기경은 일백조합인 상사(Compagnie des Cent-Associés)가 설립해 식민지 교역을 독점했다. 이후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원주민과의 모피 교역을 확장해 나가 오대호를 넘어 내륙인 마니토바지역까지 진출했다. 여성들이 적어 인구가 늘지 않아 식민지 운영에 손이 달리자 루이 14세는 '왕의 딸들(King's Daughters)'이라는 800여명의 여자들을 퀘벡으로 보내 그들이 묵던 숙소가 아직도 퀘벡 부두에 남아있다.1660년 당시, 프랑스 정착민들의 인구는 겨우 2500명이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인들이 상당수 건너왔지만 죽거나 프랑스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꾸준히 늘어 오늘날 캐나다와 미국에 거주하는 프랑스계 1천만 명은 초기 정착민 2,600명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유전적 다양성이 적어 프랑스인의 혈통이 뚜렷해 의학 연구에 유용하다고 한다.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뉴펀들랜드 섬, 노바 스코샤 지역이 영국에 할양됐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퀘벡을 포함해 캐나다의 대부분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1756년 일어난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퀘벡 역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됐다. 미국의 오하이오 지역에서 영국군과 충돌한 프랑스군은 몽 칼름 후작의 지휘 하에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며 영국군을 봉쇄했다. 영국의 피트수상은 2년 후인 1758년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며 제임스 울프 장군이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역공을 개시한다.

이 전투에 밀려 프랑스군은 퀘벡시 일대까지 물러났다. 성 밖 아브라함 언덕위에 포진한 영국군들은 언덕위에서 성안으로 포탄을 무진장 퍼부었다. 이번에도 성안 오래된 나무 밑에서 그때의 불발탄이 발견돼 전시되고 있었다. 견디지 못한 몽칼름 장군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1759년 9월 성북 쪽의 아브라함 평원으로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 전투에서 몽칼름 후작과 울프 장군 모두 전사하지만 최종 영국군이 최종 승리해 퀘벡시는 결국 영국군에게 넘어간다. 몬트리올의 프랑스 군과 총독은 항복하지 않았고 본국에서의 지원을 기다리며 퀘벡을 탈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미 프랑스해군이 영국 해군과의 해전에서 패해 구원군이 올 수 없었다. 이 7년 전쟁 후 맺어진 파리 조약에서 퀘벡은 영국에게 할양됐다. 프랑스인은 신세계를 정복하러 왔다가 패해 '정복당한 정복자'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북미 전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이것이 1776년 독립한 미국과 1867년 독립한 캐나다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