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남영진] 캐나다 동부기행 -⑤ 프랑스어권 퀘벡 주의 분리 독립운동
[칼럼 남영진] 캐나다 동부기행 -⑤ 프랑스어권 퀘벡 주의 분리 독립운동
  • 남영진 논설고문/행정학 박사
  • 승인 2018.07.20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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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남영진 논설고문]캐나다의 퀘벡주 분리 독립을 위한 주민투표가 80년과 95년 2번 있었다. 2번 다 근소한 차로 부결되었지만 1차보다 2차 때 찬성 49:반대 51로 찬성표가 늘었으니 전 세계가 이 추세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20세기 국민국가가 거의 완성됐으나 민족을 기반으로 한 분리 독립 운동은 아직 많다. 최근 영국으로부터의 스코틀랜드 독립투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시가 있는 카탈루니아 독립운동과 북부 바스크지방의 독립을 위한 테러활동 등이 두드러진다.

여기에 아일랜드 섬 북부 얼스터지방의 북아일랜드 독립운동, 이탈리아 북부동맹의 오성기동맹 독립운동 그리고 아시아에선 중국의 신장과 티벳이 있다. 그리고 러시아 카프카즈지방 그루지아국(영어명 조지아)의 무슬림조직인 체첸독립운동 등이 있다. 최근에 분리된 곳은 아프리카 동부의 에티오피아에서 에리트리아가 그리고 수단에서 남수단이 분리 독립했다. 11일 에티오피아정부와 에리트리아정부는 재전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캐나다 퀘벡주가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이유는 언어와 종교다. 16세기부터 프랑스인이 발견하고 정착한 곳이라 1763년 영국군에 의해 퀘벡성이 최종 점령되기 전까지는 ‘뉴 프랑스’였고 몬트리올시는 ‘캐나다의 파리’였다. 지금도 몬트리올, 퀘벡시를 포함한 센트 로렌스강을 따라 살아온 1,00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프랑스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의 다른 주와는 달리 신교나 영국 성공회가 아닌 노트르담이나 성 요셉 성당을 기반으로 한 가톨릭 신자들이다.

프랑스어를 쓰는 퀘벡 주 독립분위기에 불을 지핀 것은 1967년 몬트리올 국제박람회에 참석했던 샤를르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이었다. 드골대통령은 호텔 발코니에서 시청 광장 앞에 모인 군중에게 연설을 시작한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내려오면서 환호하는 군중을 보면서 2차 대전 중에 독일군에 점령당했다가 1944년 해방된 파리에 당당히 재입성 했을 때가 생각난다며 5분 55초간의 짧은 연설을 한 뒤 연호를 외친다.

퀘벡 구시가의 샤또프랑트낙 호텔전경(남영진 제공)
퀘벡 구시가의 샤또프랑트낙 호텔전경(남영진 제공)

몬트리올 만세!(Vive Montréal!) 퀘벡 만세!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Vive le Canada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군중은 열광했고 프랑스-캐나다의 외교관계는 사상 최악으로 악화됐지만 퀘벡의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고다. ‘자유 퀘벡 만세’ 는 퀘벡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구호가 됐다.

캐나다 연방정부는 이 일이 있은 후 퀘벡 분리 독립을 막고자 과감한 개혁을 실시한다. 1969년 7월 7일 캐나다정부는 프랑스어를 영어와 동등한 위치로 높였다. 캐나다가 ‘이중 언어 국가’가 됐다. 지난 6월초 토론토를 왕복하면서 ‘에어 캐나다’를 탔는데 기내 안내도 영어와 불어로, 그리고 화장실이나 모든 표지판에 영어와 불어가 함께 쓰여 있었다.

연방정부는 또한 퀘벡의 분리 독립을 막기 위해 갖가지 정치적 편의를 제공했다. 인구수에 비해 많은 국회 의석을 배정하고 국영 가톨릭학교 제도를 운영했다. 연방 총리는 당연히 두 언어를 할 줄 알아야 하고, 공식 대담을 할 때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번갈아가면서 말한다.

영어와 불어권을 나누는 캐나다 수도 오타와의 오타와강
영어와 불어권을 나누는 캐나다 수도 오타와의 오타와강(남영진 제공)

캐나다 전체는 이중 언어를 쓰지만 1977년 퀘벡 주 의회는 주내에서 프랑스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선포했다. 영어는 퀘벡 주에서는 제1 외국어다. 그래서 토론토가 있는 온타리오 주가 가까운 몬트리올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퀘벡 시에서는 거의 프랑스어만 쓴다.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모든 간판은 프랑스이고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사람들도 많다. 퀘벡처럼 언어가 민족의 구분점으로 확연하게 작용하고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드디어 1980년 5월 20일, 퀘벡의 입법권, 징세권, 외교권 등 국가로서의 주권 획득을 골자로 하는 분리 독립에 대한 투표가 실시됐다. 반대 59.56%, 찬성 40.44%로 부결됐다. 그날 저녁, 퀘벡당의 창시자이며 총리였던 르네 레베크(René Lévesque)는 “여러분은 지금 저에게 '다음에 또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그리고 이 예언대로 1995년 다시 한 번 투표가 속행됐다. 프랑스와 영국은 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당시 캐나다 총리였던 장 크레티앵은 퀘벡 주 몬트리올 출신이기 때문에 퀘벡이 독립하면 연방 총리로 남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무성했다. 약 67%가 독립을 반대하리라는 초기 설문 결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약 1%의 근소한 차이로 무산됐다.다른 주 캐나다인들은 두 번째 투표에서 더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는 것에 놀랐다. 첫 번째 투표에서는 퀘벡인 들이 분리 독립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82년 새 헌법 제정 당시 퀘벡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자 1982년 당시 집권 자유당에 대한 퀘벡인들의 분노가 높아졌다. 1988년 연방총선에서 퀘벡 당이 54석을 차지했다. 일개 한 주의 정당이 캐나다 연방의 야당으로 등장하면서 1995년 두 번째 분리 독립 투표가 행해진 것이다.독립은 무산됐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퀘벡인 들은 그다지 '캐나다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경제, 정치 등 실리적인 이유로 다른 영어권 주와 동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다른 캐나다인들도 퀘벡이 비록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지만 거의 '다른 사회' 라고 느끼고 있는 듯하다.2010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퀘벡의 프랑스어 화자들의 3분의 1은 자신을 오로지 '퀘벡인‘(Québécois, 퀘베꾸아)이라고 말한다. 39%는 '캐나다인'이라고 인식은 하나 그 전에 앞서 '퀘벡인'이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오직 20% 미만이 자신을 '퀘벡인이자 동시에 캐나다인'이라고 생각한다. 7%는 '퀘벡인'이전에 '캐나다인'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오직 '캐나다인'이라고만 소개하는 사람들은 1%에도 못 미쳤다.

앞으로 3번째 분리 독립 투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어를 쓰면서도 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토론토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이익이 퀘벡 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뱅쿠버, 캘거리 등 동쪽 태평양과 옆의 캐나디안 록키 산맥 지역이 동부보다 더 빨리 발전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이민도 이제는 토론토나 몬트리올보다 뱅쿠버 지역을 선호한다. 우리에게는 프랑스어보다 영어가 더 쉽기 때문이란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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