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해부-문재인] “노무현 후광 넘어 무패행진 값진 결실”
[집중해부-문재인] “노무현 후광 넘어 무패행진 값진 결실”
  • 소정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12.10.0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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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폐셜>민주통합당 대선후보 ‘문재인'은 누구인가

1953년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서 長男 출생...재학시절 운동권 이끌고 인권변호사로 명성

노무현과 숙명적 만남 위기시마다 구원투수...민정수석 시절 검찰개혁 선봉에서 진두지휘

노무현 서거이후 야권대선주자 반열 급부상...2012년 9월 16일 18대 대통령 후보로 확정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Newsis


◆ 부친은 함경남도 흥남 출신

지난 9월 16일 통합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문재인(文在寅)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함흥농고를 졸업하고 흥남시청 농업계장으로 근무했다.

한국 전쟁 당시 1950년 12월 흥남 철수 작전 때 미 군용함정(LST)에 몸을 실어 남한으로 내려와 거제도 포로수용소 노무자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문재인은 현재 북한에 생존해있는 이모 강병옥과 이산가족 상봉을 한 바 있다.

문재인 가족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산 영도로 이사했지만 어머니가 연탄배달을 해야 했을 정도로 일상의 삶은 매우 척박했다. 때로는 성당의 배급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문재인은 유년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모친의 연탄 배달을 돕다가 리어카와 함께 길가에 처박혔던 일을 회상한다.

문재인은 부산의 명문 경남중과경남고를 나왔다. 경남고에는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고, 입학 후 문과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수재형이었다. 그럼에도 모범생은 아니었다. 지역 명문가 자제들이 다수 입학한 경남중·고에서 계층 간의 위화감을 목도한 문재인은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를 탐독했는가 하면, 술과 담배에도 손을 댔으며, 싸움을 하는 등 4번의 정학 경험이 있다.

문재인의 고교 시절 꿈은 역사학자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장학금이 보장된 경희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문재인은 다시 태어나면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을 같이한다.

문재인은 재수 끝에 예비고사 후기로 4년제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에 72학번으로 입학한다. 경희대 재학시절 운동권의 중심에 섰던 문재인은 대학 3학년 때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았다. 이때 총학생회장이 강삼재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이었다.

당시 강삼재를 대신하여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석방되자마자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사실상 강제징집이었다.

1975년 8월 육군에 입대하여 39향토보병사단 훈련소를 거쳐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하였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12·12 때 신군부 세력에 의해 총격을 당했던 정병주 소장, 소속 여단장은 전두환 준장, 소속 대대장은 장세동 중령이었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에 투입될 정도로 ‘정예용사'이었던 문재인은 1978년 2월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이후 문재인은 사법시험에 전념한다. 문재인의 사시 합격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갑자기 작고한 아버지를 위해 사후에라도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결심에서 전남 해남 대흥사로 들어간 후 문재인은 매우 독하게 공부에 집중한다.

사찰의 사정에 의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고시공부를 계속한 문재인은 1979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재인은 재구속 됐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상황에서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미래의 장인과 장모 앞에서 권총을 든 정보과 형사들에게 체포되는 수모를 맛본다.

1980년 사법시험 제22회의 합격의 소식을 들은 장소는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서이다. 경희대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이 그의 사시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유치장을 찾았다. 그 안에서 조촐한 소주 파티가 열렸다.

합격 직후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이 문재인을 찾아와 “과거 데모할 때와 생각이 동일한가?”라고 물었지만 문재인은 “그때 나의 행동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합격 취소를 각오한 말이었지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문재인은 1975년 4월 시위 때 같은 대학 2년 후배인 음대생 아내 김정숙을 만났다. 문재인은 7년 열애 끝에 경희대 2년 후배인 김정숙씨와 1981년 결혼했다. 당시 면회를 온 문재인의 아내는 통닭이나 떡이 아닌 안개꽃을 들고 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 문재인과 노무현의 운명적 만남

문재인은 1982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을 맺은 이후 평생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로 동거동락했다. 문재인은 노 전 대통령에 비해 일곱 살 연하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은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말할 만큼 각별히 아꼈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판사 임용을 희망했지만 시위 전력과 투옥경력 탓에 좌절되자 1982년 부산에서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이때 문재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함께 부산 부민동에 '부민'(이후 부산종합법률사무소)이라는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노동 전문 변호사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아예 노동상담소를 열었다. '부민' 사무실의 안살림은 문재인이 떠맡았다. 클린 변호사 이미지를 구현하자며 관행이었던 알선 브로커를 끊고 판ㆍ검사 접대도 일절 하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 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서울에 앞서 부산에서 결성됐는데, 부산국본의 상임집행위원장이 노무현, 상임집행위원이 문재인이었다. 당시 김광일·이흥록 변호사와 함께 노무현·문재인은 대표적 부산지역 재야인권변호사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들에게 동시에 정계입문 권유가 있었다. 1988년 4월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돼 제13대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진입했다. 정치에 뜻이 없었던 문재인은 ‘법무법인 부산’을 지키면서 정치인 노무현을 물심으로 도왔다.

특히 2002년 제3회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수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음에도 ‘나는 참모용’이라며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적극 고사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당시 문재인은 노무현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아 재결합하였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당선되던 날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 영원히 계속됐으면 싶은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 청와대 수석에서 대선후보 확정까지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가 9월 16일 제1야당의 정권 재탈환을 위한 대표주자로 선출됐다. 1년 전만 해도 그가 대선 주자의 반열에 오르리라고 확신한 이는 별로 없었다. 정치인의 삶을 원치 않았던 문 후보가 현실정치에 뛰어들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필적할 야권의 대항마가 부재했던 상황에서 문재인은 저서 ‘운명’을 출간하면서 일약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제1야당의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문재인은정치적 보폭을 넓혀 민주통합당 출범을 위한 야권대통합에 참여하고 4ㆍ11 총선을 거쳐 대권 도전을 공식화했다.

소급하여 문재인과 노무현의 청와대 시절과 그 이후의 흐름들을 총괄하여 본다. 문재인은 청와대 생활의 출발과 마무리를 노무현과 같이했다. 2번의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이 그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재인을 얼마나 각별하게 신뢰하고 있는 실례 하나를 소개한다. 노무현은 TV로 생중계되던 2003년 ‘검사와의 대화’에서 갑자기 배석해 있던 민정수석 문재인을 일으켜 세웠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던 ‘검찰개혁’에 검사들이 반발하자 “이런 사람이 추진하는 건데 못 믿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

민정수석 시절 검찰 개혁뿐 아니라 국정원·경찰 등의 권력기관 개혁, 국민참여 재판제 도입 등 법원개혁, 각종 장·차관 인사, 정책 대소사에 그의 의견이 강력 반영됐다. ‘왕수석’이란 별명이 붙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럼에도 청와대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민정수석을 맡은 지 불과 1년이 못된 2004년 2월 문재인은 사퇴한다. 녹내장과 고혈압의 질환과 격무에 시달린 이유도 있었지만 그해 4월 총선에 출마하라는 열린우리당의 요구를 거절하며 생긴 불편함이 한층 컸다. 문 후보는 발음이 안 좋다는 지적을 받곤 하는데 이는 당시 극심한 스트레스로 치아 열 개를 임플란트로 교체한 탓이다.

문재인은 민정수석 사퇴 후 아내와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다. 그러나 ‘노무현과의 운명’은 너무 굳건했다. 트레킹 도중 호텔의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을 통해 노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알게 된 그는 히말라야 등반을 전격 중단하고 즉시 귀국하여 탄핵심판 변호인단 인선을 진두지휘하면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을 이끌어 냈다.

탄핵 심판이 기각된 뒤 문재인은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가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잠깐 청와대를 떠났다가 참여정부의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에 비서실장의 자리에 복귀하여 10·4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었다.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 문재인은 경남 양산으로 낙향했다. 참여정부 인사들을 향하던 검찰 비리수사의 칼끝은 노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 검찰 수사가 집요하게 이어지면서 문재인은 다시 노무현 곁으로 돌아왔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때 그는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아 장례 전반을 관장했다. 이후 노무현재단 이사장직을 맡아왔다.

문재인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2009년 10월 경남 양산 재보선 국회의원 후보, 2010년 6ㆍ2 지방선거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하라는 압박에도 한사코 현실 정치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야권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이 제자리를 맴돌면서 문재인의 등판 요구 목소리가 매우 드세졌다.

문재인은 2011년 6월 자서전 격인 ‘운명’을 발간하며 정치 행보의 본격 서막을 알렸다. 저서 ‘운명’은 출간 1년 여 만에 20만부 이상 판매되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결국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2011년 말 ‘혁신과 통합'을 통해 야권대통합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민주통합당 창당에 일조했다.

올 초 방송된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소박 소탈한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호감을 사면서 인지도와 지지율을 대폭 끌어올렸다. 2012년 대한민국 제19대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문재인은 지난 6월 17일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8월에는 자신의 정책 비전을 담은 ‘사람이 먼저다’를 출간했다. ‘쑥스러움이 많고 권력의지가 부재한 사람’으로 인각되었던 문재인은 출마선언에서 ‘불비불명(不飛不鳴)’을 말했다. 지금까지 날지도, 울지도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으나 이젠 활짝 높이 날아보겠다는 대망이다.

문재인은 8월 25일 제주를 시발로 13개 지역에서 치러진 민주당 지역순회경선에서 단 한번도 1위를 놓치지 않으며 연승 행진을 거듭하였다.

당내 경쟁자인 손학규·김두관·정세균을 뛰어 넘어 결선투표 없이 2012년 9월 16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문재인은 대표적 ‘친노 인사’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참여정부 시절 장·차관을 맡으며 국정 운영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다수 포진하여 있다. 문재인이 언제든 상시 떠올리는 사람은 노 전 대통령일 것이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문재인의 저서 ‘운명’의 마지막 문장이다. 노무현을 뛰어넘어 ‘문재인의 시대정신과 비전'으로 민심을 얻는 일이 그의 승기를 좌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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