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거사-7>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선거사-7>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S. doctor 김
  • 승인 2012.10.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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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20일 실시되며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거구별로 최다수 득표자 1명을 당선인으로 선출했다. 아울러 자유당과 원내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이 각각 공천 후보자를 추천함으로써 한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입후보자 공천제를 도입하여 정당정치의 토대를 보이기 시작한다. 휴전 협정 결과 7개의 선거구가 휴전선 이북에 속해 있어 선거를 치르지 못하여 의원 정수는 제2대 때의 210인에서 203인으로 줄었다.

선거 결과 여당인 자유당이 공천자 99명과 비공천자 15명으로 총 114명을 당선시켜 원내 다수당을 차지하였고 뒤를 이어 무소속이 68석, 민주국민당이 15석, 국민회와 대한국민당이 각각 3석을 차지하였다. 이 선거에도 여전히 무소속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정당정치가 학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전히 인물과 개인 중심의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개헌을 위한 총선

3대 국회의원 선거는 축약하여 ‘개헌을 위한 총선’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총선을 앞두고 이승만과 자유당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든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통령 중임 제한의 규정과 종신집권에 대한 염원 때문이었다. 당시 헌법에 의하면 이승만은 차기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었고 자유당으로서는 마땅한 후보가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를 간파한 이기붕은 중임 제한 철폐와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권력을 승계하는 안을 마련한다. 그런 연유로 자유당은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개헌이 가능한 국회 내 3분의 2를 상회하는 의석을 목표로 선거에 임한다.

먼저 자당의 공천을 받은 인사들에 대해 개헌 지지 서약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총선 후 진행될 개헌에 찬성할 것을 조건으로 내거는 등 그야말로 공천단계부터 철저하게 집안 단속을 실시했다. 아울러 당선 가능성이 높은 야당 후보들에 대해서는 공갈, 협박 심지어 린치를 가하여 출마를 포기토록 종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를 위해 미국의 원조 달러와 원조 물자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정계와 재계 인사들로부터 거액의 정치 자금을 끌어들여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상대 후보자의 출마를 저지하고 유권자를 매수하기에 이른다.
자유당의 조직적인 불법선거로 야당의 유세장은 폭력배들이 난무했고 야당 선거운동원들은 아무 이유 없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결국 거듭되는 테러와 협박을 이기지 못한 야당 후보자들이 스스로 후보를 사퇴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특히 이기붕과 맞서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하려던 조봉암은 후보 등록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당시 후보 등록 시 필요한 추천인 100명의 서명을 받아 가면 그 중에 몇 사람을 협박해 추천을 철회하게 하고, 다시 모아 가면 또 몇 사람을 철회시키는 방법을 써서 결국 후보자 등록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선거 결과 원내 제1당의 위치는 지키지만 개헌선 확보에는 실패한다. 결국 자유당은 야당과 무소속 의원을 상대로 집요한 포섭 · 매수공작에 들어가 6월의 3대 국회 개원 직후에는 137석을 확보해 마침내 개헌선을 넘어선다. 이 선거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26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의 기록을 세운다. 반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목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1,392표로 5위를 기록하며 낙선한다.

사사오입 개헌

1954년 9월 8일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헌법 개정안을 제출한다. 그리고 그해 11월 27일 현재 서울시 의회가 들어서 있는 중구 태평로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개헌을 위한 표결이 진행되었다. 집권당인 자유당은 개헌 정족수 136명에서 한 명이 더 많은 137명의 의원을 확보하고 있었고 또한 많은 무소속 의원들에게 차기 공천과 관련 약속을 미끼로 자파로 확보하고 있었지만 자유당 내의 이탈 세력들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수뇌부는 초조하게 결과를 주시했다.

당시 자유당 소속이었던 김영삼, 한동석, 현석호, 이태용, 민관식 등 서울대 출신 소장파들이 개헌에 강하게 반대했고 그런 연유로 자유당은 당내 이탈표를 방지하기 위해 공개투표를 제안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비밀투표로 진행되었다. 개표가 끝나자 당시 사회를 보았던 자유당 소속의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참담한 표정으로 말문을 연다. “재적의원 203명 중 가(可) 135표 ,부(否) 60표, 기권 6표, 무효 1표, 결석 1...... 이로써 개헌안은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와 관련 최순주 부의장은 표결에 앞서 국회 의사국장에게 가결선이 몇 표가 되는지 공개적으로 물었고 136표라는 답변을 들었었다. 그런 연유로 침통한 심정으로 의사봉을 두드린다.

그날 저녁 이기붕 국회의장과 최순주 부의장은 낙심한 심정으로 이승만에게 보고하기 위해 경무대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거기에 더하여 135표면 통과된 건데 그를 부결이라고 한 부분에 대해 질타한다. 이미 이승만은 표결 결과를 보고 받고 그에 대해 자신의 충복인 장경근의 안내로 당시 서울대학교 수학과 최윤식 교수와 대책을 협의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최윤식 교수의 이론, 203표의 3분의 2는 135.333…으로 사사오입 즉 반올림을 하게 되면 의결 정족수는 136석이 아닌 135석임을 설명해준다.

결국 다음날인 일요일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했고, 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를 추인하여 갈홍기 공보처장 이름으로 특별성명을 발표한다. ‘가결 정족수의 정확한 수치는 135.333……인데 자연인을 소수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하여 가장 근사치 정수인 135명이 되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최윤식, 이원철 박사 등 수학계 권위자들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29일 월요일에 열린 국회에서 자유당의 감찰부장인 이정재와 동대문 사단이 방청석을 가득 채운 가운데 최순주 부의장은 본회의에 앞서 개헌안 통과를 선포한다. 이어 야당 의원과 일부 여당 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125명의 거수기 의원들이 개헌안 통과 확정을 의결했다.

사사오입 개헌과 관련 흥미를 끄는 부분이 있다. 희비를 가른 가장 소중한 한 표에 관한 일화다. 당시 투표용지에는 ‘可(가)’즉 찬성과 ‘否(부)’ 즉 반대를 의미하는 두 글자만 씌어 있었다. 부산에서 당선된 자유당 소속의 문맹이었던 한 국회의원이 동료 의원에게 투표방식을 문의하자 사각형이 들어가 있는 글자에 투표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표소에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투표용지를 펼쳐 보았더니 사각형이 可에도 들어있고 否에도 들어 있어 결국 시킨 대로 양쪽 모두에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결국 이 투표용지는 개표 과정에서 무효표로 처리되었다.

민주당 창당

해괴한 논리에 의해 통과된 사사오입 개헌은 자유당은 물론 여타의 양심세력들에게 하나의 분출구가 되었다. 그동안 자유당 정권의 독선에 울분을 참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는, 반(反)이승만 세력의 규합을 통한 통합야당 결성의 기폭제가 된다.

먼저 민국당과 무소속동지회 및 순수 무소속 의원 등 60여 명이 호헌동지회(약칭 호동)라는 야당계 단일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이어 대여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여당인 자유당을 분열·와해시키기 위한 이면공작을 전개하여 김영삼, 민관식, 현석호, 이태용 등 자유당 소장파 의원들의 집단 탈당을 유도하는데 성공한다.

이어 계속된 정치적 탄압 속에서 새로운 통합야당의 창당을 모색한 끝에 1955년 초 ‘신당조직촉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해 9월 18일 민주당을 정식으로 출범시킨다. 대표최고위원에 신익희, 최고위원에 조병옥, 장면, 곽상훈, 백남훈을 선출함으로써 한국의 정당정치가 자유당과 민주당이라는 양대 산맥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 후일 진보당을 창당하는 조봉암의 거취 문제였다. 조봉암 역시 자유당의 독재에 저항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 하였으나 그의 노선으로 인해 호헌동지회에서 논란이 야기되었다. 장택상 · 김성수 · 박기출 · 서상일은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여에 찬성하였으나, 조병옥 · 장면 · 김도연 · 박순천 · 곽상훈 등은 조봉암의 참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반면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김성수가 적극적으로 중재 노력을 하고 나서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국 조봉암의 민주당 참여는 거부되고 만다.

S. doctor 김 블러그 바로가기 http://blog.daum.net/jwkim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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