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거사-9> 제4대 국회의원 선거-1
<대한민국 선거사-9> 제4대 국회의원 선거-1
  • S. doctor 김
  • 승인 2012.11.1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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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국회의원 선거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총선거로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최다수 득표자 1인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이전의 소선구제를 그대로 적용했다. 그러나 선거구는 3대 때보다 30개가 늘어나 233개가 된다. 또한 입후보자의 난립을 막기 위해 기탁금제도를 신설하여 유효투표율의 6분의 1을 득표하지 못할 때에는 기탁금을 몰수하도록 하였고 선거운동 관계자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선거에는 12개의 정당이 참여하였으나 선거 결과 자유당이 126석(54%), 민주당이 79석(34%), 무소속이 27석(11.5%), 통일당이 1석을 차지하였다.

투표 행태의 고착화

▲ 국정홍보처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먼저 현대식의 양당 중심 정치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통일당이 1석을 차지하였지만 선거에 참여한 여타의 군소정당이 단 한 명도 당선자를 내지 못한다.  아울러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로 정비되었고 전체적인 선거전 역시 양당의 대결양상을 보였다.

다음은 투표율과 성향이다. 현대정치의 전형적인 특징인 고촌저도(高村低都)의 투표율 그리고 여촌야도(與村野都)의 투표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투표율을 살펴보면 강원도 93%, 제주도 94.9%를 기록한 반면 서울은 80.1%로 현저하게 저조했다.

또한 투표 성향을 살피면 서울 16개 선거구에서 자유당 1석, 무소속 1석을 건진 반면 민주당은 14석을 건진다. 또한 부산 10개 선거구에서 자유당은 2석에 그치지만 민주당은 8석을 건진다. 그러나 강원도에서는 20개 선거구에서 민주당 2석, 무소속 3석 그리고 자유당이 15석을 건진다. 4대 국회는 임기 4년을 채우지 못하고 3.15부정선거에 따른 4.19 혁명에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와 더불어 개헌을 함으로써 일찍 막을 내린다.

3.15 부정선거의 전주곡

4대 국회의원 선거는 선거 이후 장면 부통령이 초유의 부정· 불법 선거로 지칭하며 급기야 5.2 총선 결과에 대해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어느 정도의 부정이 자행되었는지 당시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의 경우를 살펴보자.

당시 자유당은 선거를 실시하기 오래전부터 자유당 중앙위의장인 이기붕이 서대문을 구에서 무투표로 당선되기 위해 공작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여야 영수급 인물들의 지역구를 바터하자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그런 연유로 자유당은 민주당의 조병옥, 통일당의 김준연, 무소속의 장택상이 출마하는 지역에 자당 후보의 무공천을 주장한다. 그러나 민주당의 반대로 지역구 바터제는 무산되기에 이른다.

그러자 이기붕 측은 서대문을 구에서 지난 시절 차점을 기록했던 민주당 유력 공천후보자인 김산에 대해 개인적으로 입후보 사퇴 교섭 작전을 전개한다. 야당 인사는 물론 여당 인사들을 동원해서 그가 다른 곳으로 출마하도록 회유하나 그의 의지는 완강했다. 그러자 자유당은 충북 단양에 그의 무투표 당선을 제안한다. 아울러 그곳에 이기붕 의장이 출마한다는 소문을 내고 입후보 예정자들의 사퇴를 유도해낸다.

그러나 온갖 회유에도 김산이 굴하지 않자 자유당은 민주당 지구당 부위원장에 대해 이미 부채를 해결하여 완료된 차압봉인을 훼손하였다는 혐의로 구속하고, 또 14년이 지난 김산의 간통문제로 소환을 통보하고 기소를 서두른다.

시시각각 김산을 압박하자 당시 민주당 서울시당 위원장인 정일형과 부위원장인 김상돈 그리고 김산 세 사람은 여하한 일이 있어도 후보를 사퇴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함께 기도를 올리는 촌극까지 연출한다. 민주당의 완고한 자세에 밀려 이기붕은 결국 총선 등록 마감일인 4월 10일 오후 다섯 시에 ‘서대문을 구에서는 명랑선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성명을 내고 지역구를 이천으로 옮기기에 이른다.

이기붕의 치밀했던 부정선거 계획은 선거 진행 중에 발견된다. 이기붕은 이미 유권자 명부를 조작하여 성암동(현 상암동)에 2천8백 명의 유령 유권자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에 김산의 선거사무장이었던 김재광이 급기야 서울지검에 고발하기까지 한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서대문을 선거구에서 이변이 일어난다. 서울에서 유일무이하게 자유당이 서대문을 구에서 승리한다. 자유당의 최규남 후보가 민주당의 김산 후보를 6천여 표 앞서며 느긋하게 당선되면서 자유당으로서는 명랑선거가 이루어진다.

정치와 주먹

무투표로 당선되기 위한 공작이 실패하자 이기붕은 지체 없이 지역구를 이천으로 옮긴다. 이미 이기붕은 서대문을 구에서의 공작을 진행하면서 그 일이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서 다른 복선을 깔고 있었는데 그곳이 이천이었다. 이천은 당시 동대문 상인 연합회 회장으로 전국적인 주먹이었던 이정재가 정치를 하고자 애써 공을 들였던 지역이었다. 일찍이 이정재는 정치에 야망을 가지고 자신의 고향인 이천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려 했고 아울러 자신이 자유당 공천을 받을 것을 예상하고 표밭을 열심히 관리해놓은 상태였다.

이천에서 13대째 산 토박이로 무려 300여 군데나 되는 이천의 자연부락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마을의 대소사나 애로 사항을 해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6.25전쟁 때 사망한 마을 주민을 위해 위령비를 건립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이천의 각 학교에 재정 지원은 물론 장학금을 지급했을 정도로 공을 들였었다. 그런 연유로 1958년 총선 때 이천에서는 감히 이정재에게 대항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기붕이 경기도 이천을 택한 사유가 흥미롭다. 자신의 6대 선조의 묘가 이천에 있다는 것이 그 사유였다. 기상천외한 그의 변과 아울러 이기붕은 이정재에게 선거에 출마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이정재가 이를 거절하자 이기붕의 지시에 따라 자유당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갖은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다. 결국 이정재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선거구를 이기붕에 양보하며 자유당과 결별한다.

이 부분도 그러하지만 이어지는 이기붕의 무투표 당선 과정이 더욱 흥미롭다. 당시 이기붕을 상대하기 위해 이천에 후보로 등록했던 민주당 후보는 연윤희였다. 그 사람이 중앙당에 보고도 없이 입후보를 사퇴한 후 행방불명되었다가 5일 만에 국회 기자실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이기붕과의 대결에서 승산이 없기 때문에 사퇴했다는 변을 늘어놓는다.

당시 이 사건과 관련해서 전 언론이 대서특필 한 가운데 사건 후인 1960년 11월 15일에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린다. 사진과 함께 ‘4.19의 음지, 연윤희 씨’라는 제하에 ‘어딜 가도 쫓겨날 판’, ‘그래도 4백만 환짜리 새집 짓고’, ‘이천서 자유당에 팔린 몸’등 기사내용을 살피면 어마어마한 이권을 반대급부로 받고 이기붕에게 선선히 무투표 당선을 선사한 한국 정치판의 ‘유다’로 표현했다.

S. doctor 김 블러그 바로가기 http://blog.daum.net/jwkim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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