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거사-2> 광복 이후의 정국
<대한민국 선거사-2> 광복 이후의 정국
  • S. doctor 김
  • 승인 2012.09.2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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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사-2> 광복 이후의 정국

 

정치 단체의 태동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을 갈망하는 인사들이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노력으로 독립운동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결국 미국의 원폭투하로 인해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광복을 맞이한다.

광복을 맞이하자마자 국내에서 크게 살펴 두 개의 정치단체가 신속하게 움직인다. 이른바 우익과 좌익, 즉 각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정치단체를 결성함으로써 양대 축으로 등장한다.

먼저 1945년 9월 4일 국내에 머물러 있던 송진우를 비롯한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윤치영 등 우익 진영 대표자 82명이 서울 종로 국민학교에 모여 한국민주당(한민당) 준비위원회 발기총회를 개최한다.

이어 이틀 뒤인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여운형이 국내 인사들과, 해외에서 당시까지 귀국하지 않았던 일부 독립운동 지도자를 포함하여,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실시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중앙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배치한다.

이에 따라 한민당 준비위원회는 9월 8일 성명을 통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 건준을 비판하며 천도교 강당에서 1,600여 명의 발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개최한다.

한민당은 창당 선언을 통해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하면서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건준을 맹렬히 비난하며 공격한다. 아울러 당시까지 귀국하지 않은 임시정부 간부와 항일 독립 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승만 · 서재필 · 김구 · 이시영 · 문창범 · 권동진 · 오세창의 일곱 인사 중, 이승만 · 서재필 · 김구 · 이시영 · 문창범 다섯 명은 해외에 있었고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 직을 수락하지 않는다.

이어 미군정(美軍政)이 실시되는 과정에 10월 4일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한다. 좌익과 우익 진영 모두 주석으로 추대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이승만은 귀국하자마자 기존의 정치 단체가 아닌 좌우익을 망라한, 대한민국의 정당 · 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조직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된다.

이승만은 이를 통해 분단 반대, 신탁통치 반대 등을 골자로 선언서를 채택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박헌영의 공산당이 친일파 제거를 포함하자고 나서 결국 이승만과 공산당은 결별하게 된다. 뒤를 이어 11월 23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 일부가 귀국하면서 기존의 정치 단체가 아닌 1930년 경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한국의 민족 · 민주주의 보수정당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한국독립당의 맥을 이어나간다.

한편, 인공이 박헌영에 의해 좌경화되고 미군정은 물론 이승만과 대립하게 되자 여운형은 인공에서 나와 조선인민당을 창당하여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임시정부와의 연대를 모색하였으나 김구는 이를 거절한다.

 

정치세력의 균열

 특별하게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없던 정치단체들이 극명하게 분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무장관들이 모여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개최한 ‘모스크바 3상회의’였다 이 회의와 관련하여 동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에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뜨인다. 소련의 스탈린 원수와 미국의 반즈 국무상의 사진 위에 실려 있는 머리글이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 은 이와 크게 차이를 보인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원문을 살피면 쟁점 사항은 신탁통치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느냐’가 주된 골자였다.

즉 임시정부의 수립과 그를 도와주는 방식에 대한 논쟁이 주였는데 사주인 김성수가 참여하고 있는 한민당의 입장 을 대변했던 동아일보는 상기와 같이 보도함으로써 사회 적으로 반탁운동이 일어나는 데 일조한다.

여하튼 신탁통치 안이 보도되자마자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되어 회합이 열리고 곧바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된다. 임시정부 측은 비상 국민회의를 통하여 신탁통치를 적극 배격함으로써 독립국가 건설의 의지를 새롭게 다지고 나선다. 이에 반하여 인민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만들어 과도적 임시국회로 자처하고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한편 신탁통치를 통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 시도한다.

처음에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두 신탁통치에 반대의사를 표시하였으나, 소련의 지령으로 인하여 며칠 사이에 찬탁으로 돌변한 좌익계열의 이탈로 말미암아 통일된 전 민족적인 반탁운동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진실 여부를 떠나 조선공산당이 남한의 경제를 혼란하게 만들고 공산당의 활동자금 마련을 위해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이른바 ‘조선 정판사 화폐위조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남한 내에서 공산당의 활동을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거기에 더하여 우익에서도 균열이 생긴다. 먼저 이승만이 포문을 열었다. 이른바 ‘정읍 발언’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대해 한민당은 이승만의 정책 지지로 입장을 바꾸나 김규식,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당은 신탁통치 반대와 남북한 통일정부 노선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갈등 구조는 2회에 걸친 미소 공동위원회가 협의 문제로 좌초되자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미군정은 한반도에서의 신탁통치를 포기하고 38선 이남에 대해 이승만과 한민당의 남한단독정부 노선으로 선회한다. 결국 모스크바 3상회의의 주된 내용이었던 임시정부 수립이 아닌 신탁통치 문제를 싸고 좌·우는 물론 우도 분열하게 된다.

 

한국문제 UN 상정

 미군정이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며 한국문제를 급기야 UN에 상정하는 일이 발생한다. 비단 미소공동위원회의 불발에 따른 문제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 그리고 한국에서 미군정을 유지하는데 따른 재정적 부담 등 미국의 위신을 잃지 않기 위한 측면도 작용했다.

그 일로 UN은 총회를 열어 ‘UN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 여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모든 외국군은 철수한다’고 가결하나

소 련은 이에 불복한다. 또한 김구 역시 UN 한국임시위원단에서 남북 주둔 외국군 철수 후에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UN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UN한국임시위원회’로 하여금 한국의 총선을 하도록 하고 이에 대해 소련과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동 단체의 북한 출입을 저지하고 나선다. 그에 따라 UN은 UN한국위원회가 접근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의한다.

그를 접한 김구는 UN한국위원회에 남북협상방안을 제시한다. 그 러나 김구의 협상 제안과는 별도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 한 선거 일자가 잡히자 김구, 김규식, 김창숙, 홍명희 등 일곱 사 람은 총선 불참을 선언하고 남한 내 좌익 진영에서는 조직적인 방 해공작을 벌이기 시작한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남한에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에 반대하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1948년 4월 3일 새벽 두 시 남로당 제주도당 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면서 발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 · 민족청년단 · 독립촉성중앙회 등 극우단체 회원들이 학살되었고, 이에 분노한 극우세력은 극우세력대로 학살을 자행한다.

여기에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극우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이 터져 나오고 유혈사태는 크게 번져나간다. 이어 김구와 김규식 등 한국 대표 일행이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과 회담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다. 그러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남한 대표들이 참석하기 전인 4월 19일에 모든 조선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28명의 주석단을 선출한다.

4월 22일 평양에 도착한 김구와 김규식은 26일까지 지속된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북한의 우익 지도자인 조만식도 참석을 거부한다. 이 회의는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끝났고, 김구 일행은 협상 실패를 시인하는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한 뒤 남한으로 귀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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