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열전1> 초대 이승만 대통령 功過뭘까?
<대통령 열전1> 초대 이승만 대통령 功過뭘까?
  • 소정현 기자
  • 승인 2012.10.10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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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主義 근간확립, 親日派 권력도구로”

세종대왕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 16대손...초대부터 3대까지 역임 대한민국 건국초석

집권욕에 개헌 연이은 무리수 하야 불명예...전화극복하고 경제적 토대 농지개혁 대공로

‘친일파 척결’ 유야무야 정략적 활용 대치욕...韓美 상호방위조약 체결 안보우위 환경조성

▲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동란에서 공산침략군을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수호한 지도력과 전시외교능력에 대해서는 이대통령의 공로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 制憲國會에서 간선(間選)으로 선출

대한민국의 초대, 2대,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李承晩)은 인생 70세에 귀국하여 73세에 초대 대통령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총선거를 통해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의한 다음,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감시 하에 1948년 5월 20일 남한에서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이승만은 초대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통령직에 취임하였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어떻게 선출됐을까. 초대 수반에 선출된 이승만은 국회의원이 뽑는 '간선제' 대통령이었다. 5.10 총선거로 이루어진 제헌국회가 제정한 헌법은 임기 4년에 한 번 중임이 가능한 대통령제를 두었다.

국회 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인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해 총 200명 의원 가운데 198명(제주도 2개구는 제주 4·3 사태로 선거 연기)이 선출됐다. 동년 7월 20일 오전 10시 제헌국회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선출된다.

▲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92.3%의 압도적 승리로 당선되었다. 김구는 13표에 불과했다.

재적 의원 198명 가운데 196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헌 의회 국회의장인 이승만 의장이 개회 선언과 보고에 이어 대통령 선출을 위한 투표 절차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 1로 이승만 의원이 일방적 지지를 얻어 초대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무효 1표는 서재필 박사가 얻은 것으로 외국 국적이어서 무효로 처리됐다. 유효투표수 195표 가운데 180표를 얻어 득표율 92.3%의 압도적 승리로 기록됐다. 개표 중 이승만 의원의 득표가 3분의 2를 넘어선 132표에 이르자 제헌의원 일동은 2분간에 걸쳐 당선 축하 박수를 보낸다.

이날 오후에는 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1차 투표에서 이시영 의원이 113표를 얻어 3분의 2를 득표하지 못해 2차 투표에 들어가게 되는데, 2차 투표에서 이시영 의원이 133표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 온갖 개헌안 ‘4.19’로 수치스런 하야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집권연장을 위해 두 차례의 개헌을 변칙적으로 단행했다. 하나는 1952년 7월 7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 번째의 헌법개정으로서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拔萃改憲)이고 둘째는 ‘4사5입’(四捨五入) 개헌으로 알려진 대통령중임제한 철폐개헌이다.

먼저, 발췌개헌은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이름 붙였지만, 사실상 이승만(李承晩)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다.

6·25 전쟁 발발로 정부가 부산에 피난해 있던 1951년 12월 정략적 장기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자유당(自由黨)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52년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4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부산정치파동은 내각제정부형태와 대통령제정부형태를 혼합한 제헌헌법에 내재했던 문제점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밀어내려는 야당의 내각제 개헌기도로 말미암아 현실문제로 폭발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두 안이 정치과정을 통해 처리되지 않고 정권에서 동원한 군부대가 국회의원들을 협박하여 개헌안을 직선제로 처리한 것은 민주헌정사에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으로, 장기집권에 혈안이 된 이승만 대통령은 또다시 헌법을 개정한다. 1954년 국회는 이승만에게 대통령 3선 금지를 면제해 주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과시켰다. 1956년의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가 투표 몇 일 전에 사망하여 유권자 56%의 지지를 얻어 세 번째 당선되었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은 국내외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고 또 이 시기를 전후해서 여당 후보를 돕는 관권의 공공연한 선거개입이 행해졌다. 헌법이 보장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수시로 유린되는 사태가 계속되었다. 당연히 부정과 부패는 더욱 심해졌다.

제4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는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되었는데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이 선거전에 사망하여 이승만의 4선이 확실시되었으나, 자유당은 부통령후보 이기붕(李起鵬)을 권좌에 입성시키기 위해 대대적 선거부정을 감행하였다. 여기서 3.15 부정선거와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나왔다.

이승만 정권의 무리한 정권연장기도는 국민적 저항을 유발했고 젊은 학생들이 국민들의 선두에 서서 피로써 항쟁하며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4.19혁명을 촉발시킨 것이다. 이승만은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4월 27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같은 해 5월 하와이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병고로 시달리던 이승만은 임종을 조국에서 맞겠다는 의사를 전했으나 당시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호놀룰루에서 서거하고 시신으로 귀국했다.

그의 시신이 돌아오는 날 서울 시내는 이승만의 서거를 애도하는 시민들의 인파로 가득 찼다. 유족들은 국장(國葬) 아닌 가족장으로 영결식을 마치고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 출생에서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이고, 아버지는 경선(敬善)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이승만은 1895년 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배재학당 내에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자 적극 이에 가담하였다. 그 뒤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그 주필과 사장직을 맡아 활약하였고, 독립협회 산하의 만민공동회를 통해 부패·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독립·민권사상을 고취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19년 9월 6일 상해의 임시정부(약칭 임정) 의정원으로부터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상해로 건너가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상해 임정의 의정원에서 1925년 3월 탄핵함으로써 임시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34년 10월 뉴욕에서 이승만은 제네바에서 만났던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과 결혼하였다. 이승만 부부는 1939년 11월에 호놀룰루를 떠나 워싱턴에 정착하여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영문저서 집필에 몰두한 끝에 1941년 여름에 출판하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사건을 계기로 미·일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중경(重慶)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D.Roosevelt)와 국무성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필사적으로 전개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후 10월에 귀국한 그는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미·소의 신탁통치안 반대,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거부,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남북협상 거부 등 반탁과 반공노선을 견지하였다.

미국 방문 기간 중인 1947년 3월에 발표된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의 대소(對蘇) 봉쇄 및 반공주의적인 트루먼 독트린은 그의 반공·단정노선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 이승만 대통령의 功過를 따지다

4.19혁명 후 이승만의 반민주 독재, 부정선거, 부정부패, 반공주의에 대해 국민들의 기억이 선명하던 1960년대〜80년대에는 이승만의 연구는 사문화 되었으며 분단과 독재의 책임자로 비판하는 평가가 주류였다.

그럼에도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각급 학교를 증설하여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높이는 한편,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외교를 견지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치적을 공과 과로 나누어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의 확립과 계승을 위해서 매우 선결되어야 할 사안이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은 동서냉전으로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분단될 수밖에 없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내외정세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자율정부수립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대미외교를 통해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 대통령은 한국이 초창기에 직면했던 미증유의 혼란인 여순(麗順)반란 사건, 4.3 제주도 사건과 6. 25동란을 거치는 등 극한의 위기상황들 속에서 국민을 단합시켜 국가적 재앙을 훌륭히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국가건설의 과업으로서 안보, 외교, 교육, 농지개혁을 통한 산업발전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세워 신생 대한민국을 굳건한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동란에서 공산침략군을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수호한 지도력과 전시외교능력에 대해서는 이대통령의 공로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이승만은 대미외교를 통하여 미군의 신속한 개입, 파병을 실현시키고 유엔군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을 격퇴하였다. 전쟁 중 무력통일을 실현시키려했던 그는 국토가 분단된 상태에서의 휴전협상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확약한다는 전제조건하에 이를 수락하고 10월에 그 조약을 실현시킨다.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6.25동란 후 60년 동안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을 방지, 한국이 오늘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안보환경을 조성한 점도 핵심 공헌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 ‘최빈국 탈피’ 경제적 부흥토대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국경제는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에다 6.25의 참화까지 겹쳐 일반 서민들의 생활은 최저생계수준을 밑돌았다. 1인당 소득은 1953년의 67달러, 1961년에는 82달러 수준에 머물렀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과정과 6.25전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휴전 후부터 전화복구에 사활을 걸면서 경제 재건에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으로부터 22.8억 달러라는 당시 천문학적 경제 원조를 이끌어내 1955년까지 전화(戰禍)복구사업을 거의 완료하고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해방 후 지속된 악성 인플레이션을 1957년부터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 전면적 농지개혁 실시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전재복구(戰災復舊)에 선행하여 북한이 토지개혁을 끝낸 것에 자극받고 정부수립과 동시에 진보적 성향의 조봉암(曺奉岩)을 농림장관으로 임명하여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일제가 차지했던 식산은행 토지 등 귀속농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농지의 소유상한을 3정보 이하로 하여 농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단행함으로 한국농촌의 소작농 체제를 자영농 체제로 전환하였다.

자작농지의 비율이 전체농지의 92.4%에 달하게 한 것은 한국농업 구조상의 획기적 변화를 의미했다.

▼ 친일단죄하지 않아 ‘정통성 훼손’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정기확립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이자 기치였다. 한국은 해방 후 친일분자를 마땅히 단죄해야 했고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이 제정되었다.

그럼에도 정부수립과 치안확보, 국방건설이라는 당면한 과제의 중요성, 효율성만을 앞세워 친일분자 처리문제를 소홀히 다루다가 6.25동란을 거치면서 유야무야 해버린 것은 치명적 과오로 지적되어야 마땅하다.

이승만은 친일파숙정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고 심지어 이들을 정권창출과 유지에 활용하는 한편, 정부수립 후에도 이들을 요직에 기용함으로 민족정기를 심대하게 훼손시켰다.

심지어 해방 후 임정요인들과 반이승만(反李承晩) 계열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탄압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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