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열전 3> 제5대-9대 박정희 대통령
<대통령 열전 3> 제5대-9대 박정희 대통령
  • 소정현 기자
  • 승인 2012.11.1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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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발전 초석…독재정권 인권탄압 오명

교사에서 일본군 간부로 해방후엔 한국군 장교로...여순반란 사건에 군에서 파면 6.25 전쟁 중 복귀

1961년 5월16일, 제2군 부사령관 부임시 쿠데타...63년 67년 5-6대, 3선 개헌후 71년 7대 대통령

72년 유신헌법 영구집권 획책, 민주․인권 대후퇴...새마을운동, 수출주도경제, 고속도로건설 대업적

▲ 박정희는 1950년 육영수(陸英修)와 결혼하였다.

■ 헌정유린 쿠데타에서 영구집권 획책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이어 제 5대에서 9대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1917.11.14 ~ 1979.10.26)는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중수(中樹)이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 금오산 자락에서 빈농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 46세)과 어머니 백남의(白南儀, 45세)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정희 형제로는 박동희(朴東熙), 박무희(朴武熙), 박상희(朴相熙) 등 형이 있고, 박귀희(朴貴熙), 박재희(朴在熙) 등 누나가 있다. 박정희는 20세에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첫 결혼한바 있으며, 1950년 육영수(陸英修)와 결혼하였다.

박정희는 10세가 되던 1926년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에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영민하던 박정희는 3학년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16세가 되던 1932년에 구미보통학교를 마치고, 그해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3월 20일 졸업하였다. 이어 박정희는 21세 때인 1937년 4월 초 경상북도 문경에 소재한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0년까지 2월까지 3년간 근무하였다.

박정희는 3년여의 교사를 그만두고 1940년 4월 1일 만주의 무단장시(牡丹江市)에 소재한 제6군관구 사령부 초급장교 양성학교인 신경(新京, 지금의長春) 군관학교(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2년간의 군사교육을 마치고 1942년 3월 25일에 420명 중 1등으로 졸업한다. 이때 박정희는 나이 제한에 걸려 1차에서 낙방하였으나 장교가 되겠다는 간곡한 서신을 보내 합격의 꿈을 이룬다.

박정희는 다시 1942년 4월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44년 제57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졸업과 함께 동시에 박정희는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8·15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팔로군(八路軍, 1937~45년에 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의 두 주력부대 중 하나)을 공격하는 작전에 참가하였다. 박정희는28세가 되던 1944년 3월 1945년 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로 진급한다.

박정희는 만주군 중위로 승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8·15 해방을 맞았다. 박정희는 일본이 패전하자 베이징을 거쳐 전친항에서 부산항으로 한국 땅을 향한다. 귀국 후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에 입학하여 3개월간 교육을 마치고 동년 12월 제2기로 졸업하여 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소위로 복무하게 된다.

그 당시 1946년 9월 대구에서 좌익 시위가 촉발되었는데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가 시위를 주도하였다. 10월 1일 대구시민들과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고 박상희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여기서부터 군인으로서의 박정희는 삶은 결코 순탄치 않게 된다.

형의 영향을 받았던 박정희는 군부에 비밀리에 결성된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47년 육군소령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이 되었다. 1948년 10월 국방군 내 좌익계열의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을 거부하고, 여수·순천사건이 촉발된다.

1949년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 중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만주군 선배들의 구명운동과 군부 내 남로당원 존재를 실토한 대가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다. 이후 15년으로 감형되어 군에서 파면되었지만 육군본부에서 비공식 무급 문관으로 계속 근무한다.

박정희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현역으로 복적되었다. 1953년 11월 준장이 되었고, 1954년 제2군단 포병 사령관, 1955년에 제5사단장에 부임하였고,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과 제7사단 사단장을 거쳐 1958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뒤 제1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고, 1959년에 제6관구 사령관에 부임하였다. 1960년 1월에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에 그 해 12월에는 제2군 부사령관에 부임한다.

▲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박정희의 집권 기간은 무려 18년5개월간에 이른다.

■ 철권통치…무려 18년5개월 장기집권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의 집권 기간은 무려 18년5개월간에 이른다.

박정희는 1960년 12월부터 제2군 부사령관을 역임할 때 김종필을 비롯한 추종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라는 간판 하에 반공 친미, 부패 척결, 경제재건 등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4‧19 의거로 성립된 민주당정부를 무능‧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와 그를 추종하는 혁명주체세력은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 삼권을 장악하였다. 1961년 6월 10일에는 중앙정보부를 발족시키고, 그해 7월 3일에는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다.

▲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라는 간판 하에 반공 친미, 부패 척결, 경제재건 등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로부터 2년7개월간 군정이 실시되었는데, 우선적으로 구질서의 전면적 파타라는 모토 아래 정당‧사회단체의 해체를 포고하는 한편, 용공분자와 폭력배의 검거에 신속하게 착수하였다. '

농어촌고리채정리령'을 발표하였는가 하면, 부정축재자에 가차 없는 조사를 실시하였다. 사회기풍을 잡는 다는 명분하에 댄스홀‧고급요정 등 환락가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다.

박정희는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하자 대통령권한대행을 맡는다. 이어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동년 민선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을 15만 표의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박정희는 1967년 다시 윤보선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여 제6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럼에도 장기집권에 혈안이 되어 1969년 3선 개헌을 통과시키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꺾고 3선에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 활동 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긴급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3분의 1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등 총통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간선제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제4공화국 헌법을 국민투표에서 통과시킨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영구집권과 독재체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는 대폭 후퇴하였고 유신헌법 개정 요구가 야당과 재야에서 거세게 제기되었다. 박정희는 이를 ‘대통령긴급조치’로써 탄압하면서 정권을 명맥을 가까스로 유지하였다. 유신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 학생들이 긴급조치에 투옥 당하였다.

1974년에는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하는 비애를 맛보았다.

1978년에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으로 5선에 성공하여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5개월 후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민주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에서 뒤지는 민심 이반의 조짐이 나타났다. 1979년에 YH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 공작 정치에 의한 신민당 당수 김영삼 제명, 그에 따른 부마항쟁,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드세게 요동쳤다.

1979년 10월 16일에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반정부 항쟁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른바 부마(釜馬)항쟁이다. 부마항쟁을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지 1주일 후인 10월 26일에 박정희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후 귀경하여,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급서(急逝)하였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몰락했다.

■ 가난한 농업국가서 산업국가로 대변신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정부를 군사정변으로 전복한 집권 과정, 권력유지 과정, 인권과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극심한 탄압, 친일과 좌익 경력 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못지않게 재임 기간 중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식량 자급자족, 새마을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한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과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 모두를 살펴볼 일이다.

제3공화국 박정희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작업은 경제발전과 한‧일국교정상화였다.

한‧일국교정상화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 이유로 추진되었다. 박정희는 집권 이후 대일협상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이미 군정기간인 1961년 10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차한‧일회의가 열렸다.

여야와 정부‧국민간 극심한 대립 끝에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되었다. 국교정상화에 따라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이 유입되면서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가 성장했다.

또한 월남파병 덕분에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고성장‧수출드라이브‧산업기지건설에 박차를 가할 수 있어 국가 기틀을 다질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한강의 기적’으로 평가되는 수출입국 정책의 성공은 대한민국을 가난하고 힘겨운 보릿고개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농경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저개발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 탈바꿈시켰다.

1962년 이래 노동집약 중심으로 한 수출공업화정책이 성과를 나타내며 수출이 급속히 신장되면서 박정희 정부는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성장세에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62년 5천만 달러이던 수출은 1964년 1억 달러로 급신장을 보였으며, 1968년 5억 달러, 1969년 7억 달러, 그리고 1970년에는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상품 구조면에서도 1차 상품과 공산품의 수출 구성비가 1960년 83.2%대 16.8%이던 것이 1970년에는 공산품이 83.6%로 급속히 높아짐으로써 후진국의 수출구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73년 1월 박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추진을 선언하였다. 이를 위해 ‘중화학공업위원회’와 ‘기획단’을 두고 선진 산업국으로 나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전자, 석유화학 공업 등의 6개 업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출산업의 중화학공업화는 전자산업의 전략적 육성, 조선 공업의 수출산업화, 기계공업의 국산화, 자동차 공업의 수출전략산업화 등에 역점을 두었다.

아울러 종합무역상사의 육성, 그리고 수출자유지역의 설치, 외국인 투자 유치, 중소기업의 수출능력 강화 등 수출산업의 저변확대에도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74년의 석유위기도 수출로 극복하고, 1977년 12월 22일, 당초 1980년 달성키로 한 대망의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앞당겼다.

박정희는 과학기술 정책을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1966년의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1967년의 과학기술처 신설, 1971년의 한국과학원 설립, 1970년대의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은 그 놀라운 결과이다.

박정희의 업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새마을 운동이다. 박정희는 1970년에는 새마을운동을 시작하여 농촌 개발에 주력하였다. 범국민적새마을 운동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잘사는 농어민, 잘사는 내 고장, 번영된 조국’을 구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근대화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어려운 농촌을 잘사는 마을로 만들자는 물결이 급속하게 전개됐으니, 바로 이것이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환경개선사업부터 시작했으나 그 저변에는 농민들의 자립ㆍ자조정신을 일깨우자는 뜻이 담겨있었기에 정신계발, 소득증대 등과 함께 삼위일체로 추진되었다. 특히 소득증대사업으로 농촌경제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박정희의 업적중 대표적 하나가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만든 고속도로의 건설이다. 1967년 4월 박정희가 제6대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대국토건설계획'을 발전시켜 고속도로와 항만의 건설 및 4대강(한강ㆍ낙동강ㆍ금강ㆍ영산강)유역의 종합개발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기간 중에 착수하겠다.고 그 계획을 공표하고 나서부터이다.

경부고속도로는 교통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새로운 일대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박정희는 京仁, 경부, 호남, 남해, 영동, 동해, 구마, 언양~울산간 의 8개 고속도로를 완공시켜 전 국토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고속 도로망을 구축하여 전국을 하루 생활권으로 묶음으로써 국토 및 국민생활의 균형적 발전을 이룩했다.

박정희의 업적 중 또 하나는 자주국방이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기에 북한은 남한보다 월등한 군사력으로 적화통일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터라 북한의 군사도발과 위협은 극심하였다. 북의 남침 위협을 저지하고, 무력침공 야욕을 포기케 하기 위해선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자주국방에 부심한 기간이었다. 이와 함께 방위세 신설, 향토예비군과 민방위대 창설, 병기개발위원회를 통한 국산신무기개발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초를 닦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著書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민족중흥의 길' '국가와 혁명과 나' '지도자의 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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