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눈물로 가득한 ‘5월 광주’를 기억하라
잿빛 눈물로 가득한 ‘5월 광주’를 기억하라
  • 최신형 기자
  • 승인 2013.05.1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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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재조명-5·18 민주화운동]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 5·18민주화운동 제33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열린 전야제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 학생들이 펼치는 플래시몹 공연을 보고 있다.@뉴시스

[에브리뉴스=최신형 기자] 한 나라 안에 있는 고립된 섬. 주권도 인권도 없이 핏빛만이 남아버린 버림받은 곳. 그곳엔 계엄군의 총탄 등 군사정권의 폭압만 난무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과 함께 성큼 다가올 것만 같았던 ‘민주화의 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전두환 정권의 12·12 군사정변. 이후 고립된 섬에서 진행된 시민공동체의 항전.

우리는 그것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른다. 뜨거웠던 1980년 5월 광주는 인류 문명사의 어떤 이정표를 세웠을까.

1979년 8월 11일 신민당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여공들이 강제해산을 당한 직후 부산지역 대학생을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을  향해 유신철폐-독재타도를 외친 부마항쟁(10월 16일)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10일 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 전국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된다.

“아, 이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겠구나. 한국에도 민주화의 봄이 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한 YS(김영상) 최측근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 회장이 기자와 만나 한 말이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잠시. 같은 해 12월 12일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연행, 최규하 대통령에 대한 실각 작업에 착수한다.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다.

80년 서울의 봄은 길지 않았다. 12·12 사태로 발발한 계엄령으로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에도 안개 정국이 계속되면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규탄 시위가 촉발됐다.

3월 29일 서울지역 14개 대학교수 361명의 관련 성명 발표를 시작으로, 4월 3일 서울대생 자율활동 허용을 위한 농성 돌입, 5월 4일 학원민주화와 계엄령 해제 요구를 위한 국민연합 성명 발표 등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의 봇물이 터졌다

전두환 신군부는 시국 수습을 명분 삼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당시 DJ(김대중)는 내란음모사건, JP(김종필)는 부정축재 혐의로 각각 체포됐고 YS(김영삼)는 가택연금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 55개 학생대표로 구성된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95명이 연행당했다.

5월 18∼27일, 10일간의   ‘피의 항전’

“(광주) 금남로로 이동하자.” 80년 5월 14∼16일 민족민주화성회에서 광주지역 학생들과 시민들은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확대하면 도청 앞 분수대에서 집결하자고 약속했다.

이틀 후인 18일 오전 10시경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등교 중이던 학생들과 출입 제지에 나선 계엄군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을 해제하라.”, “휴교령을 철폐하라.” 학생들은 목청을 높이며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나선다. 하지만 계엄군은 곤봉 등을 휘두르며 폭력진압으로 맞섰다. 광주 일대는 핏빛으로 변했다.

그때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은 시내로 나와 가두시위에 나섰다. 계엄군은 오후 3시 본격적으로 공수부대를 투입, 시내 진압을 시작했다.

▲ 5.18민족항쟁서울기념사업회가 5.18 민족항쟁운동 33주년을 맞아 17일 저녁 서울광장에서 영화 '26년'을 상영하는 광장영화제를 개최, 시민들이 모여 영화를 감상하고 있다.@뉴시스

시위에 나선 학생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폭행을 당했다.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대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군부에게 폭행당한 청각 장애인 김경철 씨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과 일반 시민들이 연대하기 시작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시민공동체 항전으로 부르는 까닭이다.

하지만 신군부의 탄압은 날로 더해갔다. 18일 오후 7시경 신군부가 광주지역 통행금지 시간이 오후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하자 다음날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누문동 파출소에 불을 지르며 전두환 정권에 총궐기로 맞섰다.

19일 오후 4시 30분경 조선대 부속고생인 김영찬 군이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고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 수만 명의 시민들이 "전두환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무등 경기장과 금남로 사이에서 택시와 버스 등이 경적 시위를 벌이던 20일, 학생과 시민들은 신군부의 과잉 진압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광주 MBC 건물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계엄군은 오후 11시경 광주역 광장에서 진압에 항의하던 시민들을 향해 발포,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의 탄압이 날로 더해가는 사이 시민들은 ‘광주 KBS방화(21일)→도청 앞 1차 범시민 궐기대회(23일)→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계엄군 시내진입 저지를 위한 죽음의 행진(26일)→금남로 시가전(27일)’ 등을 전개했다.

광주민주화운동 10일째인 27일 0시, 계엄군은 광주 시내전화선을 차단하며 진압작전에 나섰고 오전 4시 10분경 도청 내에 있던 시민들에게 사격하며 전남도청 앞을 완전히 포위했다. 1시간 만에 시내 전역을 장악한 계엄군은 진압작전 종료를 알렸고 10일간의 치열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구성과 피해자보상법 제정, 김영삼 정부에서 12.12를 쿠데타로 규정한 데 이어 2011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층 발전했다.

하지만 뜨거웠던 5월의 광주는 여전히 잿빛으로 남아 있다. 지역주의 갈등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반쪽자리, 그들만의 행사로 전락했다. 보수우익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일베)에선 5.18을 ‘폭동’, 시민희생자를 ‘홍어’로 표현하며 조롱을 일삼고 있다.

정치권 역시 지역감정에 바탕을 둔 지역주의 투표행태를 일삼은 결과, 특정정당이 특정지역을 독식하며 승자독식 정치문화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87년 체제 이후 우리의 정치문화는 외형적으로 지역구도가 완화된 측면이 있지만, 시민중심의 정치문화를 조직화하는 데는 실패한 셈이다. 33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5월 광주 정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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